청자 2만3000여점 발굴···제작시기 규명 도움

참외모양주전자
참외모양주전자
고려시대 문화재 중 백미는 역시 고려청자라 할 수 있다.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도 청자의 색깔을 ‘비색(翡色)’이라 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있다. 당시 청자의 생산지는 전북의 부안, 전남의 해남과 강진 등지였다. 그러나 최대 생산지는 전남 강진이었다. 여기서 생산된 청자는 개경으로 운반되어 귀족들의 애호품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운반은 주로 해로를 이용하였다.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개경으로 운반하는 해로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청자 운반선은 때때로 침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특히 태안 앞바다 안흥량(安興梁) 일대에서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 안흥량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할 뿐 아니라 곳곳에 암초가 자리하고 있어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도 자주 침몰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한 때는 이 지역을 통과하기가 어렵다 하여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 후 안전하게 지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안흥량’으로 지명이 바뀌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 정부에서는 인공수로인 운하를 건설하려 시도하였다. 고려 17대 임금 인종 12년(1134) 내시 정습명에게 명하여 운하를 굴착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굴착 도중 암반에 부딪혀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공양왕 3년(1391) 다시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역시 실패하였다. 이후 조선 태종대에 운하 공사를 다시 시작하여 완료하긴 했으나 작은 선박만이 드나들 수 있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 등 외국 사신이 서해안을 따라 개경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안흥정(安興亭)이라는 객관이 설치되어 외국사신이 머물렀다 가기도 하였다. 이 안흥정은 마도(馬島)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된 안흥초등학교 마도 분교 자리로 추정된다.

최근 이 안흥량 일대가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난파된 청자운반선이 발견되면서이다. 2007년 5월 18일 태안군 안흥항 근해에서 어로 작업을 하던 김용철씨가 소라 통발에 쭈꾸미와 함께 올라온 청자를 신고하면서 발견된 것이었다. 이 사실이 2007년 5월 25일 연합뉴스에 보도되면서 수중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대섬 앞 바다의 바다물 속에 다량의 청자와 함께 그 운반선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발굴한 결과 고려시대 청자 운반선 1척과 고려 청자, 선원들이 사용하던 솥이나 물동이 등 선상 생활용품, 인골, 그리고 고려시대의 목간(木簡) 등이 출토되었다.

발굴 유물의 대부분은 고려 청자였다. 2만 3천 여점이 넘는 고려 청자는 완도선 발굴 이후 가장 많은 수량이었다. 기종도 다양하고 수량도 풍부하여 고려시대 청자의 편년 및 제작 시기를 밝히는데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었다. 아직 미진한 면이 있지만 연구 결과 대부분의 청자는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기종은 청자 대접, 접시, 잔 등의 일상 용기가 대부분인데 그 중에는 참외모양주전자(瓜形注子), 두꺼비모양벼루(蟾形硯), 사자모양향로(獅子形香爐) 뚜껑과 같이 독특한 것들도 있다. 또 승려들의 식사도구인 발우(鉢盂)가 다량 출토되어 당시 고려불교의 양상과 승려들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청자에 새겨진 문양도 다양하였다. 모란문, 당초문과 물고기를 그린 어문(魚紋), 연꽃 무늬인 연화문(蓮花紋), 앵무새 무늬인 앵무문, 파도문, 구름문 등 각종 문양이 시문되어 있었다.

이 수중 발굴에서 가강 중요한 것은 고려시대 목간의 출토였다. 물론 이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출토된 신안선에서도 목간이 나온 적이 있지만 수중에서 고려 시대 목간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목간의 분석 결과 여기서 나온 청자가 대부분 전남 강진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탐진(耽津)’이라 새겨진 목간이 몇 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었다.

글자가 비교적 선명하여 잘 알아볼 수 있는 목간도 있는데 그 중에는 청자의 제작 장소와 목적지 등을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예컨대 ‘탐진현재경대정인수호부사기팔십(耽津縣在京隊正仁守戶付砂器八十)’이라 쓰여진 것이 있다. 이는 직역하면 ‘탐진현에서 개경에 있는 대정 인수의 집에 도자기 팔십개를 보낸다’는 뜻이다. 이를 보면 배에 실려 있던 청자의 일부는 전남 강진에서 만든 것이며 수신자가 하급 장교인 대정 벼슬에 있는 인수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 도자기라는 화물의 종류와 그 수량까지 표기하였음도 알 수 있다. 수신인 중에는 ‘개경의 안영네 집(在京安永戶)’도 있어 수신인을 ‘호(戶)’로 표기한 경우도 있지만 ‘최대경택상(崔大卿宅上)’ ‘류장명택상(柳將命宅上)’처럼 ‘택상’이란 표현을 한 경우도 있다. 아마도 벼슬이 높은 집일 경우 특별히 ‘택상’이란 명칭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목간의 뒷면에는 ‘즉재선장(卽載船長)’이란 문자와 함께 일종의 사인(Sign)인 수결(手決)이 되어 있다. 이는 ‘앞의 수량대로 실었음. 선장 수결’이란 뜻이다. 최종적으로 화물 수량이라든가 수신인 등을 선장이 확인하고 사인한 것이다. 어떤 것은 수결의 앞과 뒤에 ‘×’와 ‘○’의 표시가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 볼 때 목간은 선적된 청자에 대한 생산지 및 목적지, 운송 물량, 운송 책임자 등이 기재된 일종의 물표(物標)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목간을 통해 당시의 경제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청자를 실은 선박의 가장 큰 특징은 외판의 길이가 다른 고려 선박의 길이보다 길면서 두께가 얇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고려 선박의 외판 길이는 5-6m이며 두께는 10-20㎝이나 이 선박은 외판 길이가 8m 21㎝이며 두께가 7㎝이다. 판재가 약하면 배의 강도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얇은 판재를 사용한 것은 외판재를 고정하는 새로운 선박건조방식 때문인지 아니면 선박에 사용되는 판재를 아끼려고 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이 태안 앞바다 대섬 근처의 청자선박 발굴로 당시의 선박 기술과 항로, 그리고 고려 시대 경제 생활의 일면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한 어부의 문화 의식 덕분에 귀중한 우리 문화재를 많이 발굴할 수 있었다. 우리의 문화의식이 그 만큼 높아졌다는 측면에서 기뻐할 일임에 틀림없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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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모양향로뚜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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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모양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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