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령산맥 경계고려-후백제 정권다툼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한 천안 천흥사지 5층 석탑.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한 천안 천흥사지 5층 석탑.
견훤의 후백제와 왕건의 고려가 정립되면서 충남 지역은 양국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당시 충남 지역의 동향은 그 지역을 독립적으로 다스리고 있던 호족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향방이 결정되었다. 특히 차령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과 이남 지역의 향배가 달랐다.

일찍이 공주는 905년 공주장군 홍기(弘奇)가 궁예에게 항복하여 태봉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918년 궁예가 내쫓기고 왕건이 즉위하자 후백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 곳을 지키고 있던 이흔암(伊昕巖)이 중앙에서의 정변 소식을 듣고 철원으로 올라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궁예의 심복이었던 이흔암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중앙 정계의 흐름을 정탐하기 위해 상경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모반의 혐의로 왕건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이 틈을 타 공주의 호족과 백성들은 후백제에 붙어 버렸다. 이는 공주가 오랫동안 백제의 수도였으므로 백제의 부흥을 내걸은 후백제 견훤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 후 태조 17년(934) 운주(運州 홍성)에서 견훤이 왕건에게 패한 후 고려에 항복할 때까지 후백제의 수중에 있었다.

이처럼 왕건의 즉위와 함께 공주가 후백제에 넘어가자 왕건은 전시중(前侍中) 김행도(金行濤)를 동남도초토사·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知牙州諸軍事)로 삼아 그 여파를 잠재우려 하였다. 아주(牙州)는 지금의 아산 지역으로 이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최소한 차령 이북은 평정하려 한 것이다. 태조 2년(919) 8월에는 오산성(烏山城)을 고쳐서 예산현(禮山縣)이라 하고 애선과 홍유를 보내어 유민 5백여 호를 편안히 살게 하였다. 예산이란 이름은 이때 처음 탄생한 것이다.

태조 8년(925)에는 왕건이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을 보내 연산진(燕山鎭 : 충북 문의)을 쳐서 빼앗고 임존군(任存郡 충남 예산군 대흥면)을 격파하여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왕건의 남방한계선은 예산―아산―천안―청주의 선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후백제 견훤은 이듬해 그의 볼모 진호(眞虎)가 왕건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명분을 들어 웅진(熊津 : 공주)에서 진격하여 북진을 하려 했다. 공주를 거점으로 북방을 경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여러 성에 명하여 성문을 굳게 사수하고 나와 싸우지 말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당시 웅주는 후백제의 최북방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태조 10년(927) 4월 왕건이 직접 웅주를 쳤으나 실패하였다. 그것은 이보다 앞선 3월에 왕건이 운주(홍성)를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이 운주전투에서 왕건군은 운주성주(運州城主) 긍준(兢俊)을 무찌르고 운주를 획득하였다. 그 기세를 몰아 웅주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던 것이다. 아마 공산성의 험준한 지세와 백제의 수도였다는 자존심의 영향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때 고려로 넘어온 긍준은 그의 딸을 왕건의 후비로 드렸다.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가 바로 그다.

한편 그해 9월 견훤은 고울부(高鬱府 경북 영천)를 습격하고 내친 김에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이때 신라의 요청을 받고 신라를 구원하러 가던 왕건은 경주를 유린하고 돌아오는 견훤군과 마주쳤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공산(公山) 전투였다. 여기서 왕건군은 참패를 하였다. 개국 1등 공신이었던 신숭겸을 비롯한 8명의 장군을 잃었다. 그리하여 후에 공산을 ‘팔공산(八公山)’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왕건은 전열을 가다듬고 착실하게 전투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후백제와의 경계 지점인 현 충남 북부 지역의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이 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성을 쌓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태조 11년(928) 4월에 운주(運州)의 옥산(玉山)에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이때 쌓은 성은 기록에 보이는 여양산성(驪陽山城)이나 월산성(月山城)일 것이다. 이어 탕정군(湯井郡 온양)에도 유금필을 보내 성을 쌓게 하였다. 그러던 중 태조 12년에는 견훤이 군사 5천을 동원하여 의성부(義城府 경북 의성)를 침략하였고 이 전투에서 이곳의 성주장군 홍술(弘述)이 전사하는 사태를 맞기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내가 좌우의 손을 잃었다”라고 하며 슬피 울었다 한다.

그러나 왕건은 실망하지 않고 반격을 가하여 결국 고창군(古昌郡 안동)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는 김선평·권행·장길 등의 토착 세력이 많은 협조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바로 이른바 ‘삼태사(三太師)’로 안동 김씨·안동 권씨·인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승기를 잡은 왕건은 천안에 천안부를 설치하여 남방의 군사기지로 삼았다. 태조 13년(930) 동·서도솔(東․西兜率)을 합쳐 천안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천안이란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로써 천안은 고려의 최남방 기지가 되었다. 태조 15년(932) 6월에는 후백제의 장군 공직(龔直)이 내항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일모산성(一牟山城 : 충북 문의)를 친히 정벌하여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태조 17년(934) 1월 왕건은 서경(평양)에 행차하여 북쪽의 진(鎭)을 두루 순시하였다. 그러는 한편 5월에는 충남 예산에 내려와 이 지역의 호족과 관리들에게 충고와 회유의 조서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운주 부근에서 견훤과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대승을 거두었다. 후백제군 3000여 명을 베고 술사 종훈(術士 宗訓), 의사 훈겸(醫師 訓謙), 장수 상달·최필 등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웅진(熊津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풍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해왔다. 여기에는 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왕건은 통일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나 견훤은 패배한 것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신검 측과 분열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조 19년 마지막 후백제와의 결전에는 천안 지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왕건은 태자인 무(武)와 박술희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천안에 가게 하였다. 이 선발대를 보낸 것은 태조 19년(936) 6월이었다. 이들은 여기서 군사훈련이나 정보 수집, 군량미 확보 등과 같은 일을 했다. 뒤이어 왕건은 그 해 9월에 3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집결하였다. 천안에 있던 선발대와 합류한 왕건은 선산의 일이천(一利川) 전투에서 승리하고 충남 연산의 황산벌에서 후백제의 항복을 받았다.

이처럼 차령 이북의 천안이나 당진, 예산 지역은 고려의 영역이었고 차령 이남의 공주, 논산 지역은 후백제의 영역이었다. 특히 공주는 후백제의 최북단 기지였던 반면 천안은 고려의 최남단 기지였다. 그 경계는 바로 차령(車嶺)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죽으면서 남긴 훈요 10조에서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금강) 밖의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고 한 역사적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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