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기마문화 유추 중요자료

말탄사람 그림 토기병

-국립공주박물관

-서산시 운산면 출토

무사로 보이는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백제 토기병.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Ⅰ-13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병(甁)의 어깨부분에 그려진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백제는 고구려 벽화고분과 같이 백제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회화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 여러 유적지에서 출토된 고고유물들을 이용하여 당시 생활상의 일부가 복원되기는 하지만 그림을 통해 직접 보는 것에는 비할 수는 없다. 백제의 회화자료는 송산리 6호분과 능산리고분군의 내의 벽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지만, 그림의 주제가 사신도(四神圖), 혹은 연화무늬와 같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백제 사람들의 생활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이 병(사진 1) 은 높이 15.5cm 정도의 작은 병으로 공과 같이 둥근 몸통에 짧은 목, 바깥쪽으로 벌어진 아가리를 갖춘 전형적인 백제 토기병이다. 표면에는 토기를 만들 때 베푼 두드림 무늬가 약하게 남아있지만,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이 작은 병이다. 말을 타고 달려가는 율동감있는 모습이 선각(線刻)으로 새겨져있는 병은 양팔을 벌리고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은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지만 손가락의 수는 정확하게 표시했다. 말 역시 선으로 간단하게 그렸지만 뒤로 뻗은 꼬리는 여러 선을 겹쳐 풍성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말의 엉덩이 부분에서 솟아올라 뒤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장식과 같은 문양이 주목되는데, 그 형태로 보아 휘날리는 장식 기꽂이와 깃발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기꽂이는 고구려 통구 13호분에 보이는 기마무사상의 기꽂이(寄生)에서 그 모양을 잘 알 수 있는데(사진 2), 무사들이 전쟁에 등에 나갈 때 말을 장식하였던 깃발 등을 꽂는 막대로 주로 철과 같은 금속을 이용해 만들었다. 고구려나 백제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가야지역의 합천 옥전 M3호 고분에서 기꽂이의 실물자료가 기꽂이가 출토되었다.(사진 3) 이를 통하여 백제에서도 고구려·가야에서와 유사한 기꽂이가 말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의 발달된 기마문화를 엿볼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말은 운송과 교통의 수단이었으며, 대외 정복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백제의 기마문화에 대하여 정확한 실체가 밝혀지진 않았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자주 등장하는 기병(騎兵)의 존재와, 수많은 백제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철제 마구류,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에 있는 말 탄 사람의 조각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에 묘사된 한 사람은 달리는 말 위에서 뒤를 향해 활을 당기는 모습이며, 다른 한 사람은 마치 전쟁터를 향해 가듯 투구(冑)와 갑옷(甲)을 입고 말을 타고 하는 모습이다.

공주 수촌리와 송산리고분군, 청주 신봉동고분군, 천안 용원리고분군, 원주 법천리고분군 등 백제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말갖춤을 통해 살펴보면, 백제의 기마문화는 4세기 중국 동북지역의 선비(鮮卑)계의 말갖춤을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백제 유적에서 발견되는 발걸이와 재갈, 안장과 말띠꾸미개, 말띠드리개, 말방울 등의 말갖춤은 당시 발전한 기마문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백제에 강력한 기마군단의 출현했음을 의미하며,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정복사업이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렇듯 여미리 유적에서 출토된 작은 병에 그려진 말 탄 사람의 그림은, 6세기 중엽-7세기 경의 백제 후반기의 유물이지만, 백제에도 신라, 고구려와 비슷한 기마문화가 있었던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김효숙 기자 press1218@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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