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소산절터 출토 희귀자료 백제인 뛰어난 미적 감각 표현

부여 부소산절터에서 출토된 치미는 높이가 91.5㎝로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치미(186㎝)에 비해 절반 크기다. 출토예가 극히 드문데다 백제시대 치미는 더욱 희귀해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부여 부소산절터에서 출토된 치미는 높이가 91.5㎝로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치미(186㎝)에 비해 절반 크기다. 출토예가 극히 드문데다 백제시대 치미는 더욱 희귀해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치미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망새’라고도 불리는 치미는 전통 건축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상징적인 조형물을 말한다. 치미는 그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새의 깃털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것으로 건물의 최상부인 지붕에 하늘을 나는 듯 날개 짓하는 치미를 둠으로써 힘찬 기상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건물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해 황룡사나 미륵사 등 대형 사찰 등 큰 건물에만 사용돼 출토예가 극히 드물다.

치미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화재와 같은 재난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동진(東晉·317-420) 시대부터 치미라는 말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고, 윈강석굴(雲崗石窟)의 부조에 처음으로 치미가 등장했지만, 그 명칭의 뜻이나 형태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남북조(南北朝) 초기(4-6세기)의 치미가 고구려·백제·신라로 전해지고, 다시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 고려 중기 이후에 용두, 취두 등 새로운 장식 기와가 나타나 이를 대체하게 되면서 취미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됐다. 또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다르나 크게 입을 벌린 조두(鳥頭)에 상투 모양의 꼬리가 하늘로 치솟는데, 후대에 올수록 괴기한 두상(頭像)이 유행한다.

부여 부소산절터에서 출토된 치미는 파손된 것을 복원해 현재 부여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높이가 91.5로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치미(186)에 비하면 절반 크기다. 출토예가 극히 드문데다 백제시대 치미는 더욱 희귀하므로 부소산절터 치미는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물인 것이다.

크게 동체부와 꼬리부로 나뉘는 치마는 그 사이에 두 줄의 유려한 곡선을 두어 미관을 돋보이게 하면서 두 부분을 구획한다. 동체부는 연속되는 직선을 날개깃 모양으로 배치, 곡선의 형태 위에 직선만을 사용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는 모습을 만들어내는 백제인의 치밀하면서도 뛰어난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꼬리부는 이러한 날개깃의 연장선상에서 위로 치켜 올려진 깃털 끝이 표현되어 동체부의 생동감을 잃지 않고 마무리됐다. 동체부에는 용마루 위에 얹어 지붕과 연결하기 위해 수키와 3매를 엎어놓은 기왓골의 모양에 맞도록 마련된 홈이 있으며, 동체부 후면에는 8엽 단판의 연화문이 시문되어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김효숙 기자 press1218@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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