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왕 군사·교통·경제적 이점 수도 이전

백제는 건국 후 3세기 중엽 고이왕(234∼286)대에 이르러 영토 확장과 더불어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낙랑군, 대방군을 북으로 밀어내면서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중앙에 6좌평제를 실시해 업무를 분담했다. 관등을 16품으로 나누고 공복(公服)을 제정해 관리들의 질서 체계를 확립하였다. 후에 고이왕을 백제의 시조처럼 기술한 것도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백제가 최전성기를 누린 것은 근초고왕(346-375) 때였다. 그는 마한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까지 장악했으며 낙동강 유역의 가야 7국도 병합했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이어 그는 중국의 요서 지역이나 산동 지방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를 편찬케 한 것도 이러한 국가 체제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5세기로 접어들면서 쇠락하기 시작한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왕(391-412)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항복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475년에는 장수왕(412-491)의 공격을 받았다. 고구려군이 침략해 오자 개로왕은 동생 문주를 신라로 보내 구원군을 얻어 오게 하였으나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455-475)이 전사하였다. 이에 문주왕(475-478)은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장수왕은 도림이란 승려를 백제에 잠입시켜 개로왕을 바둑에 빠지게 함으로써 백제의 몰락을 도모하였다. 도림과 더불어 바둑에 심취했던 개로왕은 도림의 건의로 무리한 토목 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천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문주왕은 할 수 없이 조미걸취(祖彌桀取)·목협만치(木協滿致)) 등과 함께 웅진으로 천도했다.

그렇다면 왜 백제 왕실은 다음 천도지로 웅진을 택하였을까. 첫째는 웅진의 지리적 요건을 들 수 있다. 웅진(공주)은 우선 북쪽으로 차령 산맥이 가로 질러 있어 북쪽의 고구려군을 방어하는데 유리하였고 금강이 동북쪽으로 둘러싸고 있어 천연적인 2차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 동쪽으로는 계룡산이 있어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금강의 수로를 이용해 서해로 나가 중국과 통교할 수 있었고 남쪽으로 현재의 우금치를 넘으면 부여를 지나 드넓은 호남평야가 자리하고 있어 교통과 경제의 잇점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웅진으로 천도했다.

이 외에 공주 인근 지방세력에 의한 추천도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공주 의당면 수촌리 유적이다. 수촌리 유적은 웅진성에서 북쪽으로 약 8㎞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금동제 유물을 비롯하여 환두대도, 중국제 도자기, 장신구,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지방에서 보기 드물게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들이다. 이는 아마 백제 왕실에서 지방 세력에게 준 위세품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의 연대로 볼 때 수촌리 유적은 웅진천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의 조영 세력은 백씨(白氏) 세력이 아닌가 한다. ‘백(白)’이라는 성씨는 ‘백강(白江)’의 ‘백(白)’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한성이 함락되고 황폐화되자 문주왕은 급히 천도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백씨 세력이 웅진의 지리적 이점을 들어 웅진 천도를 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도가 웅진으로 오면 자신의 세력도 중앙 무대에서 떨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이 백씨 세력은 동성왕대에 이르러 백가(白加)란 인물이 국왕의 친위부대장인 위사좌평(衛士佐平)에 오르고 있다.

이렇게 해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은 왕 2년(476) 남쪽으로 옮겨온 한성의 민호를 대두산성과 위례성에 살게 한다. 또 해구(解仇)를 병관좌평에 임명한다. ‘해씨’ 세력은 부여 계통으로 한성시대부터 중용되었던 세력이다. 온조왕 41년에 해루(解婁)를 우보(右輔)에 임명했는데 그는 부여인이라 기록되어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천도로 불안해 하던 기성 귀족 세력을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듬해에는 아우 곤지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아 친정체제를 구축한다. 그 해 궁실을 중수(重修)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왕 4년(478) 사냥을 나갔다가 해구가 보낸 자객에 의해 문주왕이 살해된다.

뒤를 이어 13세의 어린 나이에 삼근왕(478~479)이 즉위하였다. 그는 해구에 의해 옹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정사는 해구가 좌지우지하였다. 그 결과 동왕 2년 해구는 연씨(燕氏) 세력과 더불어 대두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진남(眞男)으로 하여금 토벌케 했으나 패하자 진노(眞老)가 다시 출동하여 해구를 살해하였다. 해씨 세력을 제거하는데 대립 관계에 있던 진씨 세력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삼근왕이 죽고 곤지(昆支)의 아들이었던 동성왕(479~501)이 왕위에 오른다. 삼근왕의 죽음과 동성왕의 즉위에는 진씨 세력이 깊이 개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동성왕 4년에 진노가 병관좌평에 임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 동성왕은 신진귀족 세력을 등용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동왕 6년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南齊)에 보내고 있으며 8년에는 백가(白加)를 위사좌평(衛士佐平)에 임명하였고 19년 진노가 죽자 연돌(燕突)을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씨는 부여, 연씨는 온양 일대에 근거를 갖고 있는 세력이었다.

한편 그는 여러 지역에 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고자 했다. 동성왕 8년 궁실을 중수하는 한편 우두성(牛頭城)을 쌓았고 동왕 20년에는 웅진교(熊津橋)를 설치하고 사정성(沙井城)을 축성하기도 했다. 동왕 23년에는 가림성(加林城)도 축조했다. 그의 시호인 ‘동성왕(東城王)’은 동쪽에 성을 많이 쌓았기에 붙여진 시호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그는 여러 실정을 거듭한다. 한발과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았으며 임류각을 짓고 연못을 파서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 간관들이 이를 간하자 궁궐문을 닫아걸기도 했다. 임류각에서의 잔치와 환락은 극에 달했다. 사냥 나갈 때마다 백성들은 그 비용을 대느라 허덕여야 했다. 아마 신진 귀족 세력들도 이러한 왕의 행태를 달가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문일까. 강제로 가림성에 주둔하게 된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살해하였다.

웅진시대 전반기의 백제는 이처럼 아직 확고한 국가 체제를 확립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기성귀족 세력과 신진귀족 세력의 갈등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던 것이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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