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첫 도읍지 ‘천안 직산 위례성說’ 주목

북쪽에서 본 성벽 모습(충남역사문화원 제공)
북쪽에서 본 성벽 모습(충남역사문화원 제공)
청동기 시대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이 발전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의식의 차이에 따라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청동제 무기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경쟁에 의해 지배와 피지배, 빈부의 구분이 나타나게 되었다. 힘 있는 자는 군장이 되었고 우세한 부족이 주변의 부족을 정복해 나갔다. 우세한 부족의 군장은 정복한 부족을 통치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 중 몇 명에게 권력을 위임하였고 이들은 정치기구를 만들어 피지배 부족을 통치했다. 피지배 부족의 반발을 막기 위한 무력 장치로 군대도 창설된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출현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었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제사장과 정치 지도자를 뜻하는 고조선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국가가 성립되었으나 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그것이 바로 위만 조선의 출현이었다. 위만은 연(燕) 나라 지역에서 망명해 왔으나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다(기원전 194). 위만 조선은 우수한 철제 무기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넓혀 나간다.

이 무렵 대전·충남 지역에는 마한의 소국들이 위치해 있었다. 준왕이 위만에게 찬탈당하자 남쪽으로 내려와 ‘한지(韓地)’에 정착하여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마한에는 백제국, 목지국을 비롯한 54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소국들은 백제의 건국과 성장으로 백제에 통합되어 갔다. 그런데 충남 지역이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는 것은 백제의 도읍지와 관련해서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고구려의 건국자 고주몽의 서자인 온조가 세운 국가로 알려져 있다. 즉 고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졸본 부여로 오자 졸본부여의 왕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그를 둘째 사위로 삼았다. 졸본부여 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온조가 왕위를 계승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은 비류, 작은 아들은 온조였다. 그러나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니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내려 왔다.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하고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자살하고 그의 백성들이 온조에게 오니 국호를 백제(百濟)로 개명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이 지금의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한강 이남 인근에서 찾고 있다. 즉 풍납토성설, 몽촌토성설, 하남시 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하남위례성이 천안 직산이라 주장하고 있다. 직산을 위례성으로 보는 학설은 그 연원이 꽤 깊다. 일찍이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 하남 위례성을 직산이라 한 바 있다. 또 그러다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 13년 한산(漢山)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고 이듬해에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연은 이때의 한산은 당시의 광주(廣州 :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라 하였다. 조선 성종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직산을 위례성이라 하면서 구체적인 성곽은 성거산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의 고증학자인 한백겸도 그의 저서 ‘동국지리지’에서 이같은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사실 직산 일대에는 많은 고대 산성들이 있고 위례산이라는 산이 있다. 자연 지리적 조건도 ‘삼국사기’에서 기술하고 있는 위례성의 지세와 비슷하다. 즉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북으로는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안성천이 있으며 안성평야가 있고 동쪽으로는 서운산·성거산 등의 산악이 있다. 물론 서쪽에는 멀지 않은 곳에 서해 바다가 있는 것이다.

또 근초고왕 26년(371) 서울을 한산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것도 천안 직산설의 한 근거가 된다. 근초고왕이 황해도 방면에서 고구려 군대를 물리친 후 수도를 직산에서 현 서울 인근으로 옮김으로써 이곳이 백제의 수도가 되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기사는 수도 내에서 왕궁을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일부 고고학자들도 발굴 조사를 통해 직산 지역이 위례성이라는 설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1995년 천안시 북면 운용리에 있는 위례산(해발 523m) 일대를 발굴한 서울대 조사단은 산 정상 부근에서 성문지와 우물을 발굴하여 이 곳에 위례산성이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하였다. 또 여기서 백제 시대의 세발 달린 삼족 토기와 고구려 계통의 말 모양 토우(土偶)가 출토되어 이곳이 위례성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2009년 11월부터는 충남역사문화원에서 이곳을 발굴 조사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발굴 성과가 천안 직산 위례성설의 진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위례성은 1995년 서울대 박물관의 시굴조사에 이어 1996년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져 산성의 축조시기가 통일신라시기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일부 백제 토기가 한성시기(기원전 18~475년)의 것으로 이를 기준으로 보면 성벽 축조의 상한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까지 볼 가능성도 남아있다. 이와 관련하여 직산의 위례성은 4세기 말에 축조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문주왕 2년(476) 대두산성을 수리하여 한성 북쪽의 민호를 여기에 거주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아산의 대두산성과 함께 직산에도 이들 민호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성의 황폐화로 한성 지역의 민호를 직산에 옮겨 살게 하면서 한성 지역에서 사용하던 ‘위례성’이란 지명도 자연스럽게 따라와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1995년 발굴을 담당했던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도 한 세미나에서 "천안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위례성이란 명칭이 남아 있으며 고지도, 지명, 고문헌, 전설, 고고학 자료 등에서 끊임없이 백제와 관련된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며 "백제 초도가 천안 직산읍에 있는 위례성이라는 주장을 입증할 학술자료의 확보를 위해 위례성 내부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더 세밀히 조사하여 성벽의 초축이 언제 이루어졌는가를 밝히는 작업이 관건이라 하겠다. 앞으로의 발굴 성과를 주목해 볼 일이다.

충청남도에서는 천안의 위례성이 백제의 첫 도읍지로 밝혀질 경우 2010년 세계대백제전 개최시 성화를 위례성에서 채화할 것이라 하고 있다. 만약 그럴 경우 일부 학자들의 비판도 예상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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