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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골발견 다시 주목받는 무령왕릉

2009-12-17기사 편집 2009-12-16 06:00:00     

대전일보 > 문화 >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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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108종2906점 출토… 백제문화 寶庫

첨부사진1무덤을 지켜주는 상상속 동물인 진묘수.

그 모양은 훨훨 타오르는 불꽃과 같았다. 실로 2천년 어둠에 묻혔던 백제를 밝혀주는 ‘불꽃’이었고 백제의 신비를 풀어주는 영겁의 미소였다. 그래서 고고학자건 공주도민이건 멀리서 달려온 일본기자건 ‘컴컴한 무덤’ 속에서 왕관의 불꽃같은 광채를 발하는 순간 감격할 수 밖에 없었다. <중략>1445년을 무덤 속에 묻혀온 백제의 찬연한 영광이 빛을 발한 1971년 7월8일 오후 4시15분은 우리 고장으로서는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간이 되었고 자랑이 되었다. -1971년 7월 11일자 대전일보 1면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71년 7월, 20세기 한국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다. 공주의 송산리 제 5, 6호분에 대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벽돌로 쌓아 올린 전축분을 발견, 왕릉의 입구를 메운 밀폐석을 치우자 묘지석이 있었고 이를 통해 무령왕의 능임이 밝혀진 것.

‘세기의 발굴’로 주목 받았던 무령왕릉이 또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국립공주박물관이 지난 8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재정리하던 중 인골로 추정되는 뼛조각 4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당시 졸속 발굴이 도마 위에 올랐고, 잠시 잊었던 찬란한 무령왕릉의 유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한국고고학계의 천추의 한이 되다.

1971년 7월8일 오후 4시15분은 한국고고학계의 잊지 못할 순간이자 몇몇 학자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멍에이자 천추의 한이 됐다. 무령왕이 혼이 1450년 만에 깨어났지만 30년 넘는 세월동안 ‘최악의 발굴’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당신 국립박물관장이자 발굴단장이었던 김원룡(1922.8.24-1993.11.14)박사는 저술서 등을 통해 말하고 있다.

“오른쪽 구석에 중국제 ‘네 귀 달린 청자 항아리’가 보였어요. 강한 국제성을 느꼈어요. 그리고 동전 한꾸러미가 놓여있는 석판 두 장…. 동쪽 석판의 첫줄에 ‘寧東大將軍百濟斯’의 글자가 새겨졌고, 이는 둘째 줄의 ‘麻王年六十二歲癸’로 이어졌어요.”

함께 왕릉 안에 들어간 김영배 당시 국립공주박물관장 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먼지 등으로 뒤덮인 지석을 거듭 살피며 “사마왕이면 바로 바로 무령왕이다!”라고 나지막하게 외쳤다.

그들은 내부조사를 마친 뒤 4시30분 무덤 밖으로 나왔다. 이미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전국에서 몰려운 기자들이 아우성쳤다. 각 사 당 한 컷 씩 사진기자 한사람씩 순서대로 입구 밖에서 무덤 속을 찍게 했다.

눈앞에 실물을 본 기자들의 뜨거운 취재경쟁 역시 무령왕릉의 긴급발굴을 초래하기도 했다.

가장 늦게 현장에 달려온 모 신문기자는 문화재 관리국 과장의 뺨을 다짜고짜 후려갈겼고, 누군가 안에서 사진 찍다가 청동숟가락(銅匙)을 부러뜨리기도 했다.

잘못하면 큰 사고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 발굴단은 긴급회의를 열고 유물수습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기로 결정한다. 도굴의 우려 등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결국 이러한 결정은 발굴단에게 천추의 한을 남긴다.

그후 중요 유물은 제외하고 거의 모든 유물은 상자에 쓸어담다시피했고, 추후 큰 자료가 될 수도 있었던 바닥의 부스러기유물 등은 한데모아 봉투에 담았다. 발굴단은 철야작업도 감행하며 쉴 새 없이 유물수습 끝에 단 11시간 만에 끝냈다. 1400년 넘게 잠들어있었던 유물이 자리를 떠나는 시간은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1400여년 만에 빛을 본 최고의 유물

1971년 7월부터 10월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된 무령왕릉은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이 각각 국보 154호와 155호로 지정되는 등 국보로 지정된 출토유물만 해도 총 12점에 이른다.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돼 백제문화의 보고로 손꼽히고 있다. 또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백제 무령왕 부부 지석(誌石)은 국보 163호로 일괄 지정됐고,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출토됐다. 지석은 묘지(墓地)라고도 하며, 무덤 주인공을 알려준다. 무령왕 지석과 왕비 지석(모두 가로 41.5, 세로 35㎝)에는 줄을 만들어 간략한 인적사항을 기술했다. 무령왕 지석(왼쪽) 뒷면에는 12방위표가 있으나 서쪽 부분은 누락됐으며, 왕비 지석(오른쪽) 뒷면은 매지권(買地券)이다.

무덤을 지켜주는 상상속의 동물인 진묘수부터 백제금동대향로에 버금간다고 평가받는 동탁은잔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없는 국보급 유물들이다.

백제의 왕, 왕비의 관과 관련된 금제장식은 신라 것과는 전혀 다르다. 발굴 당시 ‘금관 중의 금관’이라는 찬사를 받은 왕관은 자체는 부식돼 없어지고 각각 한 쌍의 관식만 남아 있다. ‘구당서(舊唐書)’에 ‘백제의 왕은 검은 비단관(오라관·烏羅冠)을 쓰고 금꽃으로 장식했고, 신하들은 은 꽃을 사용했다’고 기록된 것과 일치했다. 무령왕이 썼던 전체 높이 30.7cm인 왕관의 금제 장식은 전체적으로 불꽃같은 율동감과 상승세가 있는 데 반해, 왕비의 것은 단아하면서도 고요한 느낌을 준다.

김효숙 기자 press1218@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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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유물 이송 반대 시위 모습. <대전일보 DB>

첨부사진31971년 7월 무령왕릉 발굴 작업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