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에서는 2010년 세계대백제전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새로운 문화창조의 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백제문화를 이야기할 때 문화적 우수성과 함께 그 국제성을 주목한다.

그러면 왜 백제문화를 말할 때 국제성을 중시하는 것일까? 그것은 백제가 강과 바다를 잘 활용할 줄 아는 국가였고, 그를 통해 선진적 문화를 수용하고, 이를 발전시켜 다시 주변국가들에 파급시킴으로써 고대 동북아문화권의 형성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제와 관련하여 1971년을 잊지 못한다. 바로 무령왕릉이 발굴된 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록에서만 희미하게 보였던 백제문화의 우수성이 우리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백제문화의 세련되고 독창적이면서 또한 국제성을 가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동북아 문물교류의 중심에 백제가 있었음을 각종 유물들은 말해주고 있었다.

또한 백제금동대향로를 다시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93년에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에는 유․불․도교의 사상과 함께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을 상징하는 봉황과 산, 용을 조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각종 동물들을 표현함으로써 백제인들의 천하관(天下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들 동물들 가운데는 중국이나 동남아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동물들이 있는데, 이는 백제가 주변국가들과 교류한 사실을 반영한 결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백제는 강과 바다를 이용해 활발한 해양교류를 추진하였다. 백제(百濟)라는 국명이 ‘많은 포구를 가진 나라’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바탕에는 그러한 역사적 실제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백제의 역사 속에서 해양국가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으로 주목되는 것이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한다”는 ‘송서’ 백제전에 실려있는 기록이다. 이 뿐만 아니라 비슷한 내용이 ‘남사’ 등에도 실려있어 백제의 활발했던 대중교류를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백제가 중국지역에 진출하여 당시 중국인들에게 백제에 대한 강한 인식을 심어준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성왕 4년(526)에는 백제의 승려 겸익이 인도에까지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돌아올 때 불경을 가지고 와서 이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당시 겸익이 인도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활발했던 해양활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활발한 해양활동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백제인의 뛰어난 선박제조술을 들 수 있다. 일본에서 650년에 2척의 선박을 제조하였는데, 그 배의 이름이 ‘백제선(百濟船)’이었다. 이는 백제의 선박이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우수했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백제는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우수한 선박제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국제성은 문화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백제 국내에 주변국의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나 ‘북사’에는 백제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사람들은 신라·고[구]려·왜 등이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즉, 백제에는 백제인들 뿐만 아니라 백제와 교류하였던 국가의 사람들도 다수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백제의 국제적인 해양교류는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금강을 통해서이다. 백제는 475년 금강유역인 공주로 도읍을 옮긴 이후 멸망할 때까지 금강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금강이 지닌 편리함과 중요성 때문이었다. 특히 왕도를 지나는 강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강은 넓고 비옥한 토지를 제공해 주고, 외침을 막을 수 있는 자연방어선이 되었으며, 물류의 수단이자 대외교류의 교통로였다. 나아가 금강은 왕도와 각 지방을 연결해주는 매체이고, 해외교류의 교두보였다. 금강에는 삼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으로 항해하는 선박들이 드나들었으며, 고마나루와 구드래나루에는 각 지역으로 물산을 실어나르는 선박들로 성시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금강은 백제로 하여금 동북아물류의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결과 백제는 동북아 국제문화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현재 국가적인 차원에서 4대강살리기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금강살리기는 금강이 지닌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백제가 금강을 통해 해양국가로서의 위상과 백제문화의 국제화를 이루었듯이 금강살리기 사업을 통해 백제문화가 다시금 국제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강종원(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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