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국 학자의 고대 한·일 관계에 대한 저술은 흥미로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 사학자인 존 카터 코벨(1910-1996)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15세기 일본의 선화가 셋슈 연구’로 일본미술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일본 교토(京都)의 다이토쿠지(大德寺)에서 불교 미술을 연구한다. 1978년까지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주립대와 하와이대 등에서 한국미술사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1978년 돌연 서울로 발길을 돌린다. 일본문화의 근원으로서의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본 황실은 부여족과 백제계가 지배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부여기마족과 왜’(김유역 옮김, 글을 읽다, 2006)와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김유경 옮김, 학고재, 1999). 코벨은 이 저작에서 지난 1300년간 일본이 은폐해온 일본문화의 뿌리는 바로 한국이라고 역설한다. 나아가 부여 기마족이 왜를 정벌해 일본을 세웠지만 일본은 지난 1300년간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놀라운 대목은 고대 천황부터 30대 천황까지 부여인들과 백제인들이 천황이었으며 결국 일본 황실은 순수 한국인 혈통에 의해 지배됐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 최대의 고분인 닌토쿠 왕릉(仁德王陵)에 주목한다. 닌토쿠 왕릉은 전장 486m로 일본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크다. 닌토쿠 천황의 왕자 시절 스승은 왕인 박사다. 왕인 박사는 닌토쿠 왕자에게 한문과 시가를 가르쳤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닌토쿠 왕자의 천황 등극에도 왕인 박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역사학자 가운데 “닌토쿠 천황은 백제인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코벤은 닌토쿠천황이 묻힌 왕릉의 발굴이 중단된 것은 그가 백제 혈통이었기 때문이라고 의심한다. 이후 일본 정부는 고고 왕릉의 발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고 코벤은 설명한다.

일본의 백제계 유적과 유물들을 곰곰히 들여다 보면 코벤의 주장은 정설로서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의 수 많은 국보급 유물들이 백제계라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 한·일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칠지도(七支刀)와 일본의 국보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백제 제25대 무왕이 왜 왕실로 보내준 구다라관음(百濟觀音), 백제인 건축가들이 세운 세계 최대 금동불상 ‘비로자나대불’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보다 상징적인 사건도 있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지난 2001년 자신의 생일 기자회견에서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앞서 2004년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왕자가 아키히토 일왕의 허락을 받아 백제 25대 무령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지난 4월에는 백제 제26대 성왕의 제3왕자 임성태자(琳聖太子)의 45대 직계 후손인 오우치 기미오(大內公夫)씨가 부여 능산리 2호분(백제 성왕의 능으로 추정)을 찾아 제문을 올렸다.

코벤의 주장 뿐만 아니라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은 성왕이 일본 천황을 겸임했다는 논거를 내놓기도 한다. 일본 고대 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일본 제30대 비타쓰천황(敏達天皇)이 백제인 왕족임을 밝히고 있다. 비타쓰천황의 손자인 조메이천황(敍明天皇)은 현 나라현의 구다라강(百濟川) 강변에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지(百濟寺)를 짓고 구다라궁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전하고 있다. 조메이천황의 아들인 덴지천황(天智天皇)은 백제 멸망 이후인 백제에 구원병을 파병한 당사자이다. 코벤은 이미 4세기 초에 부여족이 일본으로 진출했고 이어 369년에는 왜의 야마토를 정벌해 6세기 초까지 왕권을 장악했다고 말한다.

고대역사 왜곡은 군국주의의 영향

그러나 일본 내에서 한·일 고대사의 진실은 감춰지거나 왜곡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칠지도가 백제에 의해 일왕에게 헌상된 것이라는 주장은 일본 내 최근의 역사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칠지도의 중요한 명문(銘文)이 누군가에 의해 예리한 도구로 손상된 것을 애써 외면한다. 일본의 수 많은 백제계 국보급 유물에 대해서도 현지 안내책자들은 예외없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적고 있고 아예 백제의 영향에 대한 사실을 누락하고 있는 게 다반사다.

백제문화 세계화의 정점인 2010세계대백제전을 앞두고 “일본이 역사 왜곡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군국주의의 부활”이라는 코벤의 일침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용 정치부 충남도팀장 yong6213@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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