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미치면 나도 살고 남도 산다

미쳤다는 건 한계를 넘는 몰입을 말한다. 자신의 가능성에, 그리고 이 세계의 가능성에 몰입할 때 일순 그는 미쳐 보인다. 그것은 일탈과 광기가 아니라 삶과 꿈에 온몸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열정이다. 아픔을 감지하는 감성, 극복하려는 의지, 상상력이라는 에너지가 있어야만 우리는 창조적으로 미칠 수 있다. 인류의 문명은 그렇게 미친 자들로 시작되지 않았을까.

이 책은 ‘여자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진화하다’는 부제를 달고,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을 노동하고 학습하는 여전사들의 삶을 담고 있다. 아홉 명의 멘토들이 전해주는 아홉 가지 인생 모토는 세상을 사랑하는 용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너희는 미친년들의 순정을 아는가?’ 표지날개에 적힌 질문이다. 미친년들의 순정, 순정이란 단어가 이처럼 순정적으로 다가온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순정이란 하나의 올곧음, 곧 치명적인 열정으로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사랑이다. 하여 저자는 이 순정을 청명한 휴머니즘의 진정성이라고 믿는다.

‘미친년’과 ‘건강한 현실’의 역학은 ‘진실’과 ‘소외’의 역학 관계와 비슷하다.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서로를 끌어안고 돌아가는 춤사위처럼 그것은 뜨거운 체온을 가진 존재의 형식을 보여준다. 그녀들은 세상과 불화하면서도 세상을 향한 사랑의 방식, 화해의 방식, 평화의 방식을 보여주는 데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저자 이명희는 미국으로 유학, 에코페미니즘과 신화학을 공부하면서 인문주의자의 자위적 글쓰기가 아닌 문학과 사회의 가교로서 글쓰기를 선택했다. 2005년 국내에 잠깐 들렀을 때 박영숙의 사진전 `미친년 프로젝트`를 관람한 후 `미친년`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여성의 삶을 전망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여자로 태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미친년, 마녀, 나쁜 여자로 진화하는 과정임을 이해했다. 현실과 맞장을 뜨며 모든 순간에 제 목소리를 내는 아홉 명의 멘토들은 `미친년`이라는 말의 부정적 가치를 뒤집어 그것이 진정한 여성의 미래를 품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40여 년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여성문화운동을 이끈 트렁크 갤러리 박영숙, 진보적 여성잡지『미즈』를 창간한 페미니즘의 세계적 아이콘 글로리아 스타이넘, 한국을 대표하는 우먼파워로 실리콘밸리의 신화를 낳은 CEO 김태연, 브로드웨이를 사로잡은 연출가이며 세계적 여성운동단체 V-Day 창설자인 이브 엔슬러, 뉴욕 유니언신학대학 최초의 아시아 종신교수이며 마법의 평화메신저인 현경, 21세기의 여성 사제 빅토리아 루, 뉴욕 조계사 주지인 묘지스님, 캐나다의 차세대를 이끌어갈 100인 예술가 윤진미, 시인의 심장을 가진 저널리스트 유숙렬. 이들이 저자가 만난 ‘미친년’들이다.

이 아홉 명의 페미니스트가 전하는 여성상 혹은 인간상은 우리가 평소에 당연히 여기던 질서와 관습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다. 스스로에게 최선이었던 이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한번 돌아다볼 수 있지 않을까. 박영숙은 나이에 대한 당당한 철학을 설파한다. ‘조금씩 잎을 떨어뜨리는 몸의 소리를 들어라, 그러면 안다. 늙는다는 건 또 다른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생에서 새롭지 않는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주름은 철학이다. 주름을 지우려는 순간 슬픔은 시작되고 노욕은 싹튼다. 주름은 늙음이 아니다. 늙는다는 건, 그리고 여성이 늙어간다는 건 위대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단호히 말한다. 상처를 두려워하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인종과 계층을 넘어 여성연대운동을 펼쳐온 스타이넘은 근본적인 여성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인간적인 것, 인류애라는 것이 있다는 것. 여성의 역할이 있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내가 누구인가가 문제이며, 자신의 역할을 선택할 힘이 있어야 진정한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가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자율성이라고 주창하는데 이는 가족이나 자녀의 문제에 매달려있는 대한민국 여성들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하지 않을까. 저자는 그녀를 ‘단호하되 우아하고, 용서와 화해를 아는 인간’이었다고 전해준다.

무수한 편견과 싸워 꿈을 이루어낸, 저자가 단연 ‘미친년’ 멘토 서열 1위라고 말하는 김태연은 인생에 있어 승객이 되지 말고 운전사가 되어 운전을 즐기라고 강조한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반드시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민자로 청소부에서부터 시작, 실리콘밸리의 신화를 창조한 그녀는 행복이란 세상이 만들어낸 조건에 나를 맞추지 않고 스스로를 믿고 흔들림 없이 자신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학대받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세계적인 운동단체인 V-Day를 창설하고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브 엔슬러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자신감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라고 역설한다. 어떤 소망이든지 포기하지 않으면 내가 죽은 뒤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세상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세상을 사랑하라고 조언한다.

그 외에도 이 책에 담긴 인터뷰들은 모든 가슴에 환한 등불을 켜준다. 세계적인 평화운동을 펼치며 나르시시즘이 아닌 진정한 자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창조적인 신학자 현경,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것이 진정한 신앙임을 깨닫고 차별받는 여성과 노동자를 위해 일하고 연극을 만드는 빅토리아 루, 바로 지금을 360도 미쳐서 살 것과 온전히 미치면 나도 살고 남도 산다고 설파하는 묘지스님, 캐나다의 다중문화의 혼란 속에서 절제된 자유를 읽어내고 치열함과 담대함으로 제 자연성을 키워나가는 윤진미, 자신이 주인인 여자여야 하며 세상이 다 말려도 내가 좋으면 무조건 올인할 것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 논객 유숙렬. 그들의 영혼은 진정 먼 바다를 비추는 등대가 아닐까.

저자는 아홉 멘토의 공통점은 진정한 사람의 가슴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을 사랑할 줄 안다는 점임을 밝힌다. 또한 진정 현명하고 용감한 이 시대의 산파들은 선택한 길을, 설사 돌아가더라도 놓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의지를 믿고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21세기 젊은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세상을 직시하는 힘과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라고 말한다면 너무 무거울까. 어쨌거나 자신의 가능성을 인지하는 여성이 아름답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지만, ‘미친년’, 이 매력적인 주술을 위하여 건배!

시인·사진작가 김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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