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사용하는 두 가지 방식

물론,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두 가지만 있을 수는 없다. 차라리, 모든 사람이 각각 개별적인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로만 야콥슨은 그 각양각색의 언어 사용 방식을 두 개의 범주로 수렴한다. 은유와 환유가 그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책이 최근에 다시 번역되었다. 로만 야콥슨과 모리스 할레가 쓰고 박여성 씨가 번역한 ‘언어의 토대’(문학과지성사)가 그것이다. ‘다시’ 번역되었다고 한 것은 이 책 속의 한 논문이 야콥슨의 다른 논문들과 하나의 책으로 묶여 지난 1980년대에 ‘문학속의 언어학’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번역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 속의 언어학’으로 그의 글을 읽었는데, 당시에는 신문수 씨가 번역자였을 것이다. 그 책이 절판된 지 오래였는데, 지금 다시 ‘언어의 토대’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논문이 한글의 옷을 입고 독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두 편의 논문은 ‘음운론과 음성학’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이다. 이 책의 부제가 ‘구조기능주의 입문’이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들은 언어의 일반법칙과 같은 것을 세우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음운론과 음성학’은 구조주의 언어학이 분석대상으로 삼는 요소들에 대한 설명에 치중한다. 나와 같은 문학전공자가 주로 관심을 둘 만한 글은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일 것이다.

야콥슨이 이 글에서 말하는 은유와 환유는 그 은유와 환유를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작인으로서의 실어증의 두 유형을 전제하면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이란, 언어 사용에 있어서의 인접성 장애와 유사성 장애이다.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그 충격 때문에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실어증이다. 이 실어증의 두 가지 형태로서, ‘인접성 장애’는 문장을 만드는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이고, ‘유사성 장애’는 언어 선택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인접성 장애의 경우에 실어증 환자는 주어진 단어를 개별적인 단어 자체로서는 사용할 수 있지만, 그 단어들을 모종의 맥락 속에서 결합시켜가는 일에는 무능력하다. 두 번째, 유사성 장애의 경우에 실어증 환자는 그 반대의 언어 상실을 보여준다. 이들은 언어 선택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매듭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된다. 야콥슨은 이 두 가지 실어증에 대해, 인접성 장애 환자의 경우 환유능력을 상실한 것이며, 유사성 장애 환자의 경우 은유 능력을 상실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은유와 환유는 인간의 언어 사용 방식의 커다란 두 가지 범주이다. 은유는 어떤 상황을 지시하는 언어의 저장고 속에서 하나의 언어를 선택하여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다. 가령, 한 사내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마음속에 들끓는 여러 언어 중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여 그 마음의 여러 흐름을 압축해 발화한다. 그것이 은유이다. 환유는 하나의 언어가 그 언어에 의해 지시되어야 하는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또 다른 언어로 미끄러져 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영영사전을 찾는 과정에서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 문장 중에 모르는 단어가 나와 다시 그 미지의 단어 항목으로 넘어가는 사례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총괄적으로 보면,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는, 의미의 밑바닥이 언어의 표면으로 솟아나는 경우로서의 은유와 솟아나지 못하는 경유로서의 환유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구분한 사람은 정신분석학자 J. 라캉이다. 그는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 개념을 빌려와서 무의식의 두 가지 운동 양상을 설명한다. 요컨대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의 방식으로 운동한다. 이런 구분법을 일찍이 보여준 사람은 프로이트이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언어학과 결합시켜 새차원의 담론으로 구성해 보여준 사람이 바로 라캉이다. 그래서 은유는 무의식의 압축과 상응하고 환유는 무의식의 이동과 상응한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모든 문화적 체계는 바로 이 은유와 환유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옷을 입는다. 그런데, 오늘 입은 재킷은 여러 초겨울 재킷 중에 선택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 여러 재킷을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바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재킷과 바지가 결합된다. 그것은 상의 하나로서만, 혹은 하의 하나로서만 복장의 의미가 온전히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또 다른 옷으로 계속 미끄러져 가는 과정이 환유이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신문은 가능한 여러 언어들 중 구사일생으로 지금 이 지면위에 오를 수 있도록 선택된 언어들이라는 의미에서 은유의 체계이다. 그런데, 신문은 지금 이 문화면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문화면이 우리의 모든 삶의 의미를 말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날짜의 신문이 인류의 삶을 모두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내일 모레... 등등의 시간으로 미끄러져 갈 수밖에 없다. 과장해서 말하면, 은유와 환유가 인간의 삶의 모든 체계이다. 이렇게 수사학은 우리의 일상 바로 옆에 있다. 세종시를 두고 벌어지는 정치놀음도 마찬가지이다. 세종시는 다만 언어일 뿐이다. 그것의 맥락과 깊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그 알듯 모를 듯한 맥락과 깊이가 우리 앞에는 가로놓여 있다.

최근의 현대시는 은유보다 환유가 강하게 작용하는 시라고 흔히들 말한다. 물론 야콥슨은 은유에는 환유가 또 환유에는 은유가 삼투되어 있으며 그 상호적 과정이 시적 언어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은유만으로 혹은 환유만으로 이루어진 시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가 환유가 주로 사용되는 시편들의 시대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앞에서 말한 바를 참고하면, 환유가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그 시의 언어가 현실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절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 이유는 시인들에게는 자명한 듯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아름답고 투명한 삶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시대에 언어로써 세상의 의미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이 도대체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시인들은 말하는 것이다.

야콥슨은 은유의 언어는 시의 언어이며, 환유의 언어는 산문의 언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은유의 시대는 시의 시대이며 환유의 시대는 산문의 시대라고 바꿔놓을 수도 있다. 실제로, 시인들이 미래에 대한 투명한 예감으로 불타올랐을 때인 80년대는 시의 시대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다만 알 수 없는 미지의 미래시간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정녕 다시 은유의 시대는 오지 않는 것일까?

참고로 이 책의 옥에 티 하나를 지적해 둔다. 본문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문장 “산문에서는 은유, 운문에서는 환유가 거부감이 가장 적으며(113면)”는 “운문에서는 은유, 산문에서는 환유가 거부감이 가장 적으며”로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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