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恨 담아 축조한 산성…백제인 혼·지혜 고스란히

기쿠치성에 복원돼 있는 팔각형의 고루(鼓樓, 왼쪽)와 미창(米倉). 팔각형의 고루는 일본 고대 산성 가운데 유일하다.
기쿠치성에 복원돼 있는 팔각형의 고루(鼓樓, 왼쪽)와 미창(米倉). 팔각형의 고루는 일본 고대 산성 가운데 유일하다.
일본 내 고대 산성(山城) 은 29개 정도가 확인된다. 이 가운데 백제식 산성은 6개 정도. 그 중 4개가 규슈(九州)지역에 집중돼 있다. 후쿠오카(福岡)현 다자이후(太宰府)의 오노성(大野城), 사가현(佐賀)현의 기이성(基肄城),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對馬島)의 가네타성(金田城), 그리고 구마모토(熊本)현 야마가(山鹿)시의 기쿠치성(鞠智城)이다. 이와 함께 가카와(香川)현의 야시마성(屋島城), 옛 야마토(大和) 땅(현 오사카부와 나라현의 접경지역)의 다카야스성(高安城) 등도 백제식 산성으로 꼽힌다. 이들 산성은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왜가 구원병을 보내 벌인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왜 왕조가 일본 방어를 위해 축조한 산성들이다. 백제인들에 의해 백제식으로 쌓은, 백제의 혼이 어린 산성이다. 이 중에서도 기쿠치성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낯익은 산성이자 고대 한·일 관계를 극명하게 웅변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백제식 산성이라는 학습 효과이기도 하겠지만 기쿠치성의 풍경은 왠지 낯설지 않다. 산성에 올라서면 탁 트인 시야가 한 눈에 들어 온다. 북동 방향으로는 해발 1000m 정도의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남동방향으로 기쿠치 평야가 펼쳐져 있다. 높은 산을 배후에 두고 있고 전면으로는 기쿠치천과 비옥한 평야가 조망되는 풍경은 풍수지리에 근거한 입지임을 알게 한다. 중심 표고는 145m에 불과하지만 맑은 날에는 멀리 구마모토와 나가사키의 산까지이 보인다고 한다.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는 비교적 맑은 날씨 덕분에 흐릿하게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사시에는 아리아케해(有明海) 해상의 동태를 봉수로를 통해 이 곳 기쿠치성까지 전할 수 있다고 한다. 산성의 정상부는 넓고 평평하다. 산성의 바깥 쪽 둘레는 3.5km이고 그 안의 면적은 55ha에 달한다. 도쿄돔의 12배나 되는 면적이다. 산성의 입지를 둘러보면서 망국의 한을 품고 왜의 요청에 따라 이 곳에 산성을 축조했던 고대 백제인의 안목과 지혜를 느끼게 된다.

기쿠치성의 축조 시기에 대한 문헌 상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른 백제식 산성의 축조 시기가 나오지만 기쿠치성은 빠져 있다. 다만 일본서기에는 698년 다자이후 관청에서 오노·기이·기쿠치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665년 축조된 오노·기이성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규슈지역의 다른 고대 산성과는 달리, 기쿠치성이 내륙에 위치하고 있는 점도 의문이다. 한반도에서 보면, 일본 열도의 최후방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유사시 안전한 장소에서 오노성이 있는 다자이후의 후방 거점 및 병참기지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게 학계의 일반론이다.

기쿠치성이 백제식 산성이라는 점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구마모토의 역사학자들은 경기 하남시의 이성산성(二聖山城)과 기쿠치성이 매우 흡사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국내 이성산성은 모두 4개나 된다. 경기 하남 뿐만 아니라 전북 장수와 충북 증평, 충남 연기 등에도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같은 이름의 이성산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경기 하남시의 이성산성은 입지적인 특징이 기쿠치성과 유사하다. 더욱 두드러진 특징은 팔각형의 건물지다. 기쿠치성에는 팔각형의 고루(鼓樓)가 복원돼 있다. 건물지를 발견한 뒤 옛 문헌 등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팔각형의 건물지는 일본의 고대 산성에서 유일하다. 이성산성에도 제사를 지낸 제단으로 추정되는 팔각형의 건물지가 있다. 한국 내에서 팔각형 건물지는 경기 이천의 설봉산성 등 3곳 밖에 없다. 이성산성이 백제 또는 신라계 산성이라는 학설이 양론하고 있지만 기쿠치성과의 유사성은 거꾸로 이성산성이 백제계 산성임을 반증케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서기에는 이 팔각형 고루와 관련된 특이한 기록이 남아 있다. 699년과 898년에 기쿠치성의 북이 스스로 울렸다는 기록이다. 이 고루의 최상층인 3층에는 연락용 북이 있다.

기쿠치성이 백제식 산성이라는 보다 분명한 유물이 지난해에 발굴돼 일본 사학계를 들썩이게 했다. 지난해 11월 9일, 구마모토현립장식고분관은 기쿠치 성 내부 서쪽 저수지의 1.5m 지하에서 발굴한 청동보살입상(靑銅菩薩立像)을 공개했다. 이 불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고 두 손으로는 무언가를 쥐고 있으며 신체의 옆면은 S자형으로 돼 있다. 전체 높이 12.7cm의 불상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불상을 받침대에 꽂아 고정할 수 있도록 뾰족한 돌기가 하단에 붙어 있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이 불상이 7세기 후반에 제작된 백제계 불상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선 10여 점의 백제계 불상이 전해오고 있지만 고대 유적에서 출토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이 불상이 예산군 대흥면 교촌리에서 출토된 청동보살입상과도 같은 구조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불상에도 기쿠치성의 불상처럼 하단에 뾰족한 돌기가 있다. 이 때문에 기쿠치성의 불상은 따라서 백제인 장인에 의해 구마모토에서 제작됐거나 또는 백제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 백제 유민에 의해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동보살입상이 출토된 저수지에서는 백제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목간(木簡)도 발견됐다. 이 목간에는 ‘秦人忍口五斗’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구마모토 역사학자들은 ‘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세금으로 기쿠치성에 납부할 때 쓰던 몰표로 추정하고 있다. 진인은 규슈지역에 진출한 백제 도래인(渡來人)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와 관련해 기쿠치성 근처에는 송미신사(松尾神社)가 있는데 문헌에 따르면 이 신상의 신직으로 고대로부터 ‘진인’ 가문에서 맡아 왔다고 한다. 당시 기쿠치성이 있던 구마모토 일대에는 백제인들이 폭넙게 분포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기쿠치성은 지난 67년부터 모두 30여 차례의 발굴이 이뤄졌다. 발굴을 통해 팔각형과 국가형, 십이각형 등 수 십여동의 대형건물지와 목간, 막새, 농경용구 등이 발견됐다. 또 토루와 석루 등의 구조도 판명됐다. 이를 토대로 팔각형 고루와 미창(米倉), 병사(兵舍), 무기 보관창고로 여겨지는 판창(板倉) 등을 복원해 놓았다. 산성의 입구에는 기념전시관인 온고창생관(溫故創生館)이, 산성의 중앙부에 온고창생비가 세워져 있다. 온고창생비는 산성의 축성을 지도한 백제 귀족의 동상이 저 멀리 평야를 손으로 가리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지난 2005년 2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기쿠치성은 구마모토현에 의해 국영공원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구마모토현의 각계 인사들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러면서 충남도 등 한국의 측면 지원도 주문하고 있다. 조만간 백제인의 손에 의해 축조된 산성이 일본의 국영공원으로 지정되는 것은 백제문화 세계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로 생각된다.

구마모토현에는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백제계 유적이 있다. 5세기 후반에 축조된 에타후나야마고분(江田船山古墳)이다. 전방후원고분인 이 곳의 석관 안에선 금동제관모, 순금제 귀걸이, 동경, 금동제관, 금동제 신발 등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 200여점의 유물은 일괄 국보로 지정돼 있다. 특히 칼등에 은로 75문자가 상감된 은상감명대도(銀象嵌銘大刀)가 출토되기도 했다. 이 고분에서 금동제관모와 신발 등의 유물은 한국 내의 백제 고분에 출토된 유물과 같은 계보로 평가되고 있다.

이용 기자 yong6213@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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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치성의 창고 건물지.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 터 뒤로 최근 복원된 병사(兵舍)가 보인다.
기쿠치성의 창고 건물지.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 터 뒤로 최근 복원된 병사(兵舍)가 보인다.
일본의 대표적인 백제식 산성인 구마모토현 기쿠치(鞠智)성의 산책로. 정상부에 올라서면 드넓은 기쿠치 평야 등 사방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백제식 산성인 구마모토현 기쿠치(鞠智)성의 산책로. 정상부에 올라서면 드넓은 기쿠치 평야 등 사방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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