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화는 ‘표면의 문화’다
널리 알려진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의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겠다. F. 제임슨은 고호의 그림 ‘농부의 신발’에 대해 농민의 고통을 원료로 해서 그에 대비되는 유토피아를 생산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린다. “우중충한 농촌의 대상세계를 의도적이고 격렬한 변형에 의해 유화물감의 순수색으로 찬란하게 구체화한 것은 (…) 적어도 저 가장 뛰어난 감각(시각, 시각적인 것, 눈)의 매우 새로운 유토피아적인 영역을 생산하고 마는 하나의 보상행위”(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같은 그림에 대해 내렸던 해석으로서 ‘대지 위에 놓인 존재자의 존재론적 개방성’이라는 주장과 미묘하게 갈라진다. 제임슨과 하이데거는 둘 다 농부의 고통을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제임슨은 그 그림이 삶의 고통을 시각적 쾌락과 유화물감의 물질성으로 전환시키는 자본주의적 전문화의 결과라고 쓰고, 하이데거는 예술작움의 매개를 통해 세계와 대지가 스스로의 실재성을 드러낸다고 쓴다. 이 미묘한 차이를 미적 감각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부각시키는 것은 샤피로(Meyer Schapiro)의 주장이다. 그는 고호의 그림이 농부의 신발이 아니라 (아마도 고호 자신일)도시에 사는 사람의 신발일 것이라고 말한다. 샤피로의 하이데거 비판에는 그림을 그리는 주체가 얼마나 정확하게 대상을 재현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전제되어 있다.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정확한 재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샤피로의 그 말을 받아서 행한 비판, 즉 샤피로도 하이데거도 사실의 재현이나 진리의 현전이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The Truth in Painting)은 농부의 신발에 대한 해석학적 차이를 해체적 기표의 놀이로 바꿔놓을 것을 제안하는 셈이다.
제임슨이 앤디 워홀의 ‘다이아몬드 가루 신발’을 물신주의의 한 예로 들면서 그것을 고호의 신발과 대비하는 것은 그러므로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달한다. ‘관람인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그를 위한 최소한의 이해의 터전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작품’은 “프로이트나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의 물신과 관계를 가진다”고 제임슨은 말한다. 그것은 욕망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는, 그렇지만 아무리 그것을 소유해도 가짜 해결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사물이며, 가짜해결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오직 사물 자체일 뿐인 사물에 대한 집착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이미 제임슨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서,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신발 해석에 대한 논평 중에 “한켤레의 신발은 최소한 ‘물신’으로의 운동을 금지한다”(The Truth in Painting)고 쓸때, 나아가 그 신발 그림은 사물을 “정상적인” 용도로 고정시킨다고 쓸 때, 여기에는 ‘물신’이 아닌 존재의 형식을 언급하려는 힘겨운 노력이 들어 있다. 가령, 위의 진술과 함께 펼쳐진 옆 페이지의 사진은 여성의 구두 한 짝을 그려놓은 마그리트의 그림(꿈의 열쇠―말이 사물을 보여줄 수 있을까 중 ‘달’ 부분)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용도를 환기하는 그림이 아니라 구두라는 사물의 이름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그림이다. 그 구두 그림을 그려놓고 ‘달’이라는 명칭을 덧붙여 놓을 때, 도드라지는 것은 그것의 용도도 참된 재현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사물 자체로 있는 구두의 물신성이다. 그러나 낡고 신발끈이 풀어진 고호의 ‘한 켤레’ 그림은 바로 그 한 켤레라는 사실 때문에 물신성과 크게 대비된다.
워홀의 ‘다이아몬드 가루 신발’ 역시 ‘한 켤레’ 신발이 아니다. 그것은 ‘한 짝’의 신발을 형형색색으로 여러 개 형용해 모아놓은 것이다. 제임슨은 이 그림이 상품물신주의를 전면화하면서 역설적으로 강렬한 정치적 비판을 제기한다는 말로 워홀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구성해낸다. 그러나 이 구성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제임슨이 정작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깊이 없는 피상성의 출현’이다. 그것은 화재의 찌꺼기같은 죽어있는 사물이며 아우슈비츠에서 남겨진 신발더미처럼 생명력이 사라진 사물들이다. 그것을 죽음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면, 워홀의 이미지는 생명력이 사라진 사물의 바로 그 죽음을 그려내되, “내용 차원의 죽음이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또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는 전혀 관계 없는 듯한 방식으로 보는 사람의 물상화된 시선을 당혹케 한다”(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고 제임슨은 쓴다. 요컨대 사람들은 이제 죽음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깊이 없이 묘사되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표면에서 움직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표면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이야말로 감각의 차원을 환기한다. 감각은 무엇보다도 신체 표면의 한 부분에서 시작하여 넓고 깊게 확장하는 능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호의 그림을 보면서 여러 해석 혹은 기표 연쇄를 볼 수 있는 것도 그 표면적 감각의 확장과 심화라는 능력에 기대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감각이 확장되고 심화된다는 것은 그것이 아직 부분적이고 표면적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그것은 부분이기 때문에 전체로 확장되어야 하고 표면이기 때문에 이면으로 심화되어야 한다. 이 확장과 심화의 과정에서 모든 예술이 감각의 영역 안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감각의 구성체이지만 감각 외부의 영역을 개척하는 동시적 운동을 통해서 감각의 매질로 존재한다. 감각 외부의 의미에 집중하는 경우가 이때 발생할 것이다. 감각이 이념을 동반하는 것도 이때이다. ‘감각의 이념’이라는 문제설정이 필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의 감각이 본격적으로 문제되기 시작하기 이전의 예술들, 요컨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계기를 전면화하는 예술들은 모두 자신의 무게중심을 감각 외부의 바로 그 역사와 사회에 두고 있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정시마저도 서사적 양식이라고 이해하는 제임슨(The Political Unconscious)의 주장이 이렇게 해서 나타난다. 그것은 감각의 부정이 아니라 그 감각의 심화와 확장 과정에서 획득하게 되는 감각의 잠재화이다. 지금 우리시대의 예술의 감각을 초점화하면서 그 감각이 이미 있었던 것들의 드러남이라는 사실을 밝혀둘 필요가 있는 셈이다. 예전에 감각은 그렇다면 어떤 것이었을까?. 삶을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하려는 감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사라진 듯하여 불만이다. 표면만이 있고 죽음마저 죽음답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현대예술인 듯하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