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 그 원초적 가능성을 꿈꾸며

어깨동무라는 말이 있다. 유년의 날들, 또래와 함께 어깨를 겯고 타박타박 걷던 먼짓길이 떠오른다. 아무리 먼 길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시절이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종알거리며 지루한 줄 모르고 걱정없이 걸었던 길. 그때 영혼이 부쩍부쩍 자라지 않았을까. 그렇게 우린 말과 살을 경험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동무’라는, 관계론에 관한 새로운 개념과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저자는 동서양의 지성사에서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맺었던 스물 한 개의 동행을 참신한 시선으로 직시한다. `말이 통하는 지적 반려`라는 동무의 가능성을 다양한 관점에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동무와 연인, 곧 우정과 사랑은 인간에게 가장 피부에 닿는 존재감일 터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내리는 그 정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짧은 서문에 담긴 결론은 날카롭고 단호하다.

“동무는 불가능한 것을 가리킨다. 가능하지만, 오직 타락했으므로, 닿을 수 없으므로 가능해지는 사연들을 일컬어 연인이라고 부른다. 가족을 버리지 않으면 스승을 따를 수 없었던 경험처럼, 스승, 혹은 그 지평으로서의 동무의 불가능성을 증명해주는 세속의 덕으로 우리 모두는 친구를 구하고 연인을 사귀며 가족을 얻어 다시 세속에 보은한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듯이 이 말은 불가능성을 통해서 동무의 가능성과 방향을 확인하는 있는 게 아닐까. 말도 살도 모두 인간의 조건이니만큼, 그것을 동행으로 형성하는 것도 인간의 의지이며 선택이다. 동무는 살의 가능성을 함유한 말의 가능성, 그 모두를 포월하는 진실의 가능성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동무인 것과 동무가 아닌 것을 고찰함으로써 진정한 동행의 윤곽을 보여주지만 모든 것이 그다지 단순하지는 않다. 그건 모든 인간이 정답이 없는 개성적인 존재이며, 모든 삶이 해답이며 동시에 해답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동무는 정서적 공감으로 시간을 먹고사는 친구와 다르다. 대의의 푯대를 세우고 뭉치는 ‘동지’도 아니고, 사랑이라는 통속적 의미의 ‘연인’도 넘어서는, ‘동무’라는 저자가 제시하는 개념은 새로운 존재론이다. 동무란 친구, 동지, 연인을 넘어서는 지성적인 만남이다. 어깨를 겯고 함께 먼 길을 가는 데는 친구보다 동무가 더 적당하다. 친구는 단순한 오래 사귐이지만 동무는 어떤 일에 짝이 되는 사람을 말한다. 훨씬 운명적이라고 할까. 그는 동무는 同無다! 라고 말한다. 곧 같음(同)이 없는(無) 사이라는 것이다. 곧 동무는 和而不同을 본질적 속성으로 삼는다. 틈이 중요하며, 서로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함께 걷는 관계임을 그는 강조한다. 동무는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동무관계가 지향하는 조건과 요소들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인정, 강제하지 않는 지적 자극과 서늘한 긴장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소통의 중심에 말이 놓여 있다. 말은 서로 배우고 가르침으로써 서로의 무늬(人紋)가 겹쳐지게 하고, 정신을 키워나가는 지적 반려의 관계를 구성한다. 이는 인류의 진정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사유가 아닐까. 다시 말해 동무는 이 시대가 추구해야 할 모든 가능성을 이르는 게 아닐까. 연인의 살이 고기로 느껴질 때조차도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철학자 김영민이 주창하는 ‘동무’라는 개념의 무늬가 선명해진다. 페이지 곳곳에서 저자는 사랑이 지속되는 방식은 말에 있음을 역설한다. 말이 가지고 있는 정신성, 영혼성은 살을 따뜻하게 하고 또 살을 극복하게 한다. 戀人이라는 단어, 즉 그리워할 戀자에는 ‘말씀 言’이 들어가 있다. 이는 마음이란 말을 실처럼 끌어당기는 데서 만들어지는 것, 곧 사모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말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건 아닐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하이데거와 아렌트, 루 살로메와 니체, 샤틀레 부인과 볼테르 등. 그들의 이름이 늘 함께 회자되는 까닭은 그들이 ‘연인’이기 전에 ‘말이 통하는 지적 반려’였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항상 ‘말’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동무성, 즉 말이 가지고 있는 그 원초적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는 지혜를 가졌던 것이다. 그들은 ‘말’과 ‘말에 담긴 정신’을 통해 서로를 자극하면서 자신만의 빛나는 지성을 닦았다. 이 특별한 지적 소통은 사랑을 완성하고 지속하는 가장 강력한 자장인 것이다.

‘말이 통하는 지적 반려’의 관계는 연인보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 친구 사이에서 그 징후가 더 많이 보인다. 염화미소로 대변되는 전심(傳心)의 이치를 보여주는 부처님과 가섭의 관계는 한 지극한 경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최고의 인간관계에 대한 추억이라고 말한다. 또한 크레이스너와 폴록의 애정을 예로 들면서 둘 사이의 예술적 창의성이나 생산성과 호혜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은 상호인정임을 강조한다. 동무의 깊은 인정과 배려를 통해 사랑과 열정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덕무와 박제가의 교우를 설명하면서 기존의 체계에 발붙은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지식의 외연을 넓히도록 서로 자극하는 사이를 동무의 조건으로 보여준다. 때문에 동무는 사적인 호의나 호감을 넘어서 신뢰로 묶여야 한다. 사적인 친밀성이 사회적 객관성을 띤 믿음으로 진화하지 않는 한 동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 김영민의 지적 사랑과 자유, 인내와 침묵, 자유는 매우 스피노자적이다. 현재 그는 밀양에서 거의 수도자에 가까운, 염결적인 자세로 앎과 삶에 몰두하고 있다. ‘동무’라는 새로운 무늬로 지성들의 새로운 지적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그의 인문학적 작업은 매우 미래적 지평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동무는 인류가 새롭게 열어야 할 자유인 것이다.

동지와도 다르고 친구나 연인과도 다른 ‘동무’가 우리 존재를 보다 자유롭게 할 것인가. 이 새로운 소통의 지향은 우리를 도구적이고 기계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보다 의지적이며 우정적인 존재로 획득해낼 수 있을까. 모든 재능과 관습, 사회적 규범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적 의미망을 획득하고, 행복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 어쨌거나 공통의 가치를 발견하고 나누고 추구하는 건 존재의 본능적인 즐거움에 속하는 것이리라. 최첨단 정보화의 시대, 그러나 우린 진정한 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 시대에 진정한 지적 반려자에 대한 가치와 고뇌는 커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보부아르의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사르트르와 나 사이에는 항상 말이 있었어요.”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