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속의 백제 혼-백제마을 ‘난고손(南鄕村)’

2009-11-11기사 편집 2009-11-11 06:00:00

대전일보 > 기획 >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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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족 망향의 恨·수수께끼 같은 패망의 역사 ‘애달프도다’

첨부사진1난고손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마련된 공원. 백제왕의 모형이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다. 이후 한 무리의 백제 왕족이 고향을 등지고 왜로 향한다. 이들이 처음 도착한 곳은 지금은 일본 나라현 땅. 그러나 이 곳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다시 뱃길을 따라 정처없이 유랑에 나선다. 이들은 항해 중에 일본의 내해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서 폭풍우를 만나 미야자키현(宮崎縣)의 난고손(南鄕村)으로 흘러든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곳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백제왕족은 타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난고손에 1300여년에 걸쳐 전해오는 백제왕의 전설이다.



구마모토현(熊本縣)에서 난고손으로 가는 길은 마치 강원도 산골짜기의 이름 모를 마을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깊고 때로는 음습하게 느껴지는 산림지대의 구불구불 이어진 2차선 도로를 따라 3시간여를 달려야 했다. 한없이 이어진 삼나무숲의 골짜기길을 따라 가다보니, 마치 무엇에 쫓기듯 깊은 산 속으로 피해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1300여년 망향의 한과 비탄을 삼키며 미야자키로까지 흘러 들어야 했던 백제왕족의 심정은 이보다 더 했으리라.

어렵사리 찾아낸 난고손. 입구에 들어서자 ‘백제 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반긴다. 깊고 깊은 산 속 마을에서 만나는 ‘백제’라는 낯익은 명칭은 숨겨져 있던 역사의 은밀한 내면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2000여명의 주민이 모여사는 난고손은 곳곳에 백제의 체취가 물씬 묻어난다. 한국어 입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길에서 만나는 주민들은 서툰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다.

난고손은 백제 왕족이 정착했던 땅이다. 백제왕족이 이 곳까지 오게된 배경에는 망향의 한과 함께 멸망국가의 비통함이 어려 있다. 난고손에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이들 왕족은 정가왕(楨嘉王)과 그의 차남인 화지왕(華智王), 그리고 정가왕의 장남인 복지왕(福智王)이다. 정가왕 일족의 내력에 대해선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일가이거나 후손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들은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나라현으로 망명의 길에 나섰지만 672년 일본 조정에서 권력투쟁이 일자, 이를 피해 다시 나라현을 떠나 규슈(九州)의 미야자키로 떠밀리듯 왔다. 그리고 이 곳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면서 왕족 일가도 한 많은 생애를 마무리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들 백제 왕족의 최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이 있다. 일본 내에서의 전쟁 통에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나·당 연합군 또는 일본군의 추격군에 의해 암살됐다는 설이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려 오고 있다. 백제 왕족은 나라현에 정착했지만 그 곳으로 추격군이 쫓아 왔고 이들을 피해 난고손으로 숨어 들었지만 끝까지 추격에 나선 자객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대전일보 취재진이 난고손을 방문했을 때도 난고손의 공무원은 “전쟁 중의 사망이 아니라 추격군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난고손에는 1300여년의 시간을 단숨에 되돌리듯, 백제 왕족의 유적과 유물들이 비운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난고손 마을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니카도신사(神門神社)는 정가왕을 모신 신사다. 마을 사람들이 정가왕을 기리기 위해 718년에 창건됐다. 당시 정가왕은 일본인들에게 불교 문화와 건축술, 농업 등 선진 문물을 가르쳤다고 한다. 정가왕이 나라현을 떠난 때가 672년이고 니카도신사가 건립된 때가 718년이므로 짧지 않은 기간동안 정가왕은 난고손에서 백제의 선진문명을 전파하며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0년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미카도신사에선 4-7세기 시대의 백제계 청동 거울 24개가 쏟아져 나와 일본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게다가 검과 곡옥(曲玉) 등 ‘神器 3종’에 해당하는 유물들도 대량으로 발견됐다. 신기 3종은 왕권을 상징하는 보물이다. 또 주변지역에선 수 많은 마구류와 1000여점의 경질토기가 발굴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사학계에선 난고손 일대에 정가왕이 정착한 것은 물론이고 그 이전부터 강력한 백제계 세력이 세습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미카도 신사가 있는 난고손의 옆 마을에는 차남인 화지왕(華智王)을 모시는 신사가, 또 그로부터 90km 떨어진 기조정(木城町)에는 장남인 복지왕(福智王)을 모시는 히키(比木)신사가 따로 있다. 672년 여러 척의 배로 나라현을 떠나올 때 폭풍우를 만나 흩어지면서 서로 다른 곳에 정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마다 음력 12월18일을 전후해 2박3일간 시와스마츠리(師走祭)라는 제사가 열린다. 이는 뿔뿔이 흩어진 백제왕족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다. 머나먼 타향에서 망향의 한을 품고 스러진 백제 왕족의 부자가 1년에 한 번씩 재회하는 행사가 1300년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난고손에는 한·일 우호를 상징하는 ‘백제관’이 건립돼 있다. 1991년 건립된 백제관은 부여의 왕궁터에 세워진 객사를 모델로 건축됐다. 당시 기와와 받침돌 등을 한국에서 직접 들여왔고 단청무늬도 한국의 단청사 7명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백제관 내부에는 금동대향로 등 백제문화를 소개하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백제왕족의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된 니시노쇼소인(西正倉院)도 백제마을 관광 프로젝트의 하나다. 일본 나라현의 일본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는 나고손에서 발견된 동경 등 동일한 보물이 있고, 쇼소인 건축에 백제의 건축기법이 활용됐다는 점에서 착안해 10년 간에 걸쳐 건립했다고 한다. 니시노쇼소인은 나라현의 쇼소인과 같은 실물 크기로 재현돼 웅장함을 뽐낸다. 마루 밑 기둥 높이가 2.5m, 총 높이 13m에 달한다. 난고손의 백제왕족에 관한 전설과 동경 등 관련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난고손은 지난 91년부터 부여군과 재매결연을 체결해 교류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난고손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마을 언덕에는 공원이 조성돼 있고 그 곳에는 부여 낙화암에 있는 백화정(百花亭)을 모방하여 지은 육각형의 정자도 세워져 있다. 이곳에 있는 ‘인연의 종’은 부여군에서 기증한 것으로 한글로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백제마을 난고촌에 보내는 소리’라고 새겨져 있다. 지난 1993년 대전 엑스포 때에는 ‘1300년 만의 귀향’이란 주제로 백제왕족 3인의 신주(神主)가 현해탄을 건너 부여에서 1박한 뒤 엑스포에서 행진하기도 했다. 말그대로 1300여년 만에, 죽어서도 꿈에 그렸을 고향 땅을 밟은 것이다.

난고손에는 한 때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수 년 전부터는 뜸하다고 한다. 국제교류원 소속의 한국인 통역은 “이 곳에서 근무한 지가 3년쯤 됐는데 1년에 수 차례 정도 한국인들이 방문한다”며 “대전일보 취재진도 수 개월 만의 한국인 방문”이라고 말했다.

정가왕은 누구이고 이 곳에서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생을 마감해야 했는 지, 그리고 일본에서 그가 품었을 꿈은 무엇이었을까. 수수께끼 같은 백제 패망의 역사에 대한 의문을 간직한 채 난고손을 빠져 나오는 길에는, 정가왕이 고향녘을 향하며 보았을 산과 하늘이 1300여년의 모습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이용 기자 yong6213@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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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일본 미야자키현의 백제마을인 난고손의 미카도신사. 백제왕을 모신 신사다.

첨부사진3일본 미야자키현 난고손에 건립돼 있는 니시노쇼소인(西正倉院). 나라현의 정창원을 실물 크기로 재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