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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과 무지

2009-11-06기사 편집 2009-11-0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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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까지만 해도 서울은 그저그런 한촌(閑村)에 불과했다. 경복궁이 세워지고 현재의 종로와 세종로에 정부기관이 줄지어 들어서고 나서야 중세 도시의 모습을 갖췄다. 그렇다고 곧바로 번성한 도시로 탈바꿈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수도 서울, 즉 한양의 사(四)대문 안 인구가 10만 명에 가까운 선으로 증가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조선 개국공신 중 한 명인 정도전이 1398년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부하들에게 쫓겨 숨은 곳이 현재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동쪽 대각선 방향의 건너편 숲속이었다. 정도전은 이 숲에 숨어있다가 결국 발각돼 칼을 맞고 목숨을 잃는다. 정도전이 이방원 부하들이 휘두른 칼에 의해 세상을 떠난 곳은 현재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사 자리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불과 200-300m정도 떨어진 거리밖에 안 된다. 한 나라의 수도로 결정되고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이 들어섰는데도, 그 인근은 쫓기는 사람이 한동안 몸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울창한 숲으로 남아 있던 것이다.

1905년 1월1일 대전역이 현재의 동구 중동에 문을 열었을 때 주변지역 역시 몇 사람 살지 않는, 한가한 농촌 마을에 불과했다. 한밭이라는 지명을 우리가 잊지 않고 있음에 비춰본다면 이곳은 논과 밭이 아주 많았던 농촌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대전역 개통 전부터 들어와 살기 시작하던 일본인들은 개통되던 그해 2000명 정도로 급증했다고 ‘대전 100년사’는 전하고 있다. 이 책은 이 지역의 첫 인구통계가 나온 게 1915년으로 6061명이었다고 알려준다. 대전 인구가 비약적인 증가세를 띠기 시작한 것은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옮겨온 1932년을 전후해서이다. 1930년 2만1696명이던 대전 인구는 1932년 3만3843명, 1937년 4만1명이었다.

대전이 오늘날의 대전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 중 중요한 한가지는 충남도청이 옮겨왔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인구가 증가했고 기업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세종시도 원안대로 추진된다면 비슷한 발전상을 보일 게 틀림없다. 상주인구 50만은 원안 계획보다 빠르거나 다소 늦어질 수도 있다. 아무튼 정부부처가 이전해 온다면 시기가 문제지 규모를 갖추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정운찬 국무총리는 이 같은 면을 극구 외면하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4일 정 총리는 발표를 하면서 “수도를 분산시킨 나라들 가운데 잘된 나라가 없다”고 단언했다. 100년간 행정수도를 가꾸고 만들어온 오스트레일리아나 수도를 분산시켜 발전해온 네덜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무지의 결과’라며 지적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류용규 정치부 지방팀장 realist@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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