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식민주의론 넘는 아시아문학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역락, 2009)는 한국 대만 중국 일본의 근대문학 연구자들이 모여 일제말기의 동아시아 문학과 역사에 대해 논의한 결과들을 정리한 책이다. 지난 2005년부터 매년 한차례 씩 각국의 연구자들이 한국에서 모여 심포지움을 진행했고, 그 결과가 책으로 엮여 나온 것이다. 편집한 사람은 일본의 오오무라 마쓰오와 한국의 김재용이다. 편자들은 모두 한국과 일본에서 한국근대문학의 연구 경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다. 김재용은 한국의 일제 시대 문학 연구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일제말기의 문학 판도를 ‘저항’과 ‘협력’이라는 화두로 분석하고 있으며, 북한문학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실제적인 교류를 ‘거의 유일하게’ 진행하고 있는 학자이다. 오오무라 마스오는 일본의 몇 안 되는 한국문학통이다. 와세다 대학에서 얼마 전에 퇴직한 그는 한국 근대문학의 일제시대에 남겨진 자료를 집대성하여 한국 학자들보다도 더 많이 문학연구의 실증적 조건을 갖추어놓은 학자이다. 이들의 경향으로만 판단해도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에는 현재 진행되는 한국문학의 서구중심주의적 연구 편향과는 다른 관점이 스며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역락출판사에서 오래전부터 기획되고 있는 ‘식민주의와 문화총서’의 열 번째 책인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서문에서 ‘비민족주의적 반식민주의’라는 용어 하나를 제시한다. 이 용어는 90년대 이후 한국학계를 지배해왔던 ‘포스트(post)식민주의’에 대한 반정립의 과정에서 제출된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란 구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난 현대세계체제가 사실은 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그늘 아래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학문적 이념이다. 예를 들면,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그 제국주의국가들로부터 배운 근대적 이념을 동원하여 국가를 세우고 통치한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적 자민족주의가 제3세계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듯이, 실제로 그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의 파행은 상당부분 그 제국주의의 악영향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알렝 핑켈크로트 같은 사람은 그래서, 제3세계의 민족주의적 통치에 활용되는 ‘우리’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그 나라 내부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집단주의적 독재의 밑거름으로 활용된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아리프 딜릭은 포스트식민주의의 출발에 대해 상당히 시니컬한 태도로 말한다. ‘포스트식민주의가 시작된 것은 제3세계의 학자들이 제1세계로 이주해 들어와서 학문활동을 하면서부터’라는 그의 지적은 제3세계의 포스트식민주의 학자들이 욕망했던 서구지향성과 제1세계 학자들이 환호했던 학문적 엑조티즘이 교묘하게 결합된 결과라는 사실을 꼬집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구에서 비서구사회를 분석하고 지배하려는 무의식적 지향성이 들어있는 셈이다. 이렇다면,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포스트식민주의론이야말로 제3세계 학문의 서구세계에 의한 종속 내지 식민화의 한 양상을 드러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비민족주의적 반식민주의’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것은 그러므로 온갖 형태로 위장된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서, 혹은 ‘포스트식민주의’라는 서구의 호명을 넘어서서, 제3세계에서 그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의 역사를 바로 제3세계의 관점에서 정의하겠다는 태도이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에는 그 포스트식민주의론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아시아 학자들의 고뇌에 찬 육성이 들어 있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 ‘포스트식민주의론’이야말로 서구중심주의의 변형된 판본이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견해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의 주장에 여전히 서구적 사유의 그림자가 어른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포스트식민주의론의 이념을 원용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각 나라의 문학적 상황을 선험적 이론에 근거하지 않고 보다 실증적으로 살펴보려는 태도이다. 실증주의는 종종 비판되듯이 불가지론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수 있지만, 이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선험적 이념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실제 현장의 문학작품들이다. 한국,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에서 축적한 문학적 실물들은 대부분 근대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억압적 힘에 대응하는 과정의 온갖 고투의 산물이다. 포스트식민주의론이라면 이 고투의 산물들에 대해 이른바 ‘저항’과 ‘순응’ 혹은 ‘단절’과 ‘반복’이라는 용어로 그것들의 의미를 분석하고 무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저항은 곧 무의식적 순응이며 제국주의로부터의 단절은 그 제국주의의 삶과 역사의 이념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포스트식민주의론은, 선험적 이념과 이론을 떼어내고 문학작품에 즉한 연구 결과 앞에서 앙상한 논리로 주저앉고 만다. 문학이 이념 이전에 존재하는 싱싱한 생명의 목소리를 언어적으로 육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삶의 이념은 바로 앙상한 논리적 이념을 건너뛰는 곳에서 형성된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의 연속 심포지움의 결과물들은 바로 그 문학의 실제 모습을 연구의 차원에서 실증해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이 과잉인 시대에는 차라리 실증이 이론 이전의 실천인 법이다.

일제시대에 조선의 사상범들을 투옥하고 고문했던 ‘서대문형무소’는 군부독재기간동안 서울구치소로 개명되어 민주인사들을 투옥했던 곳이다. 그곳은 지금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곳에는 일제에 의해 구속된 민족인사들을 고문하고 취조하는 다양한 모형관이 상절 전시되고 있는데, 모형관 앞을 지나갈 때마다 민족인사들의 비명과 신음 소리가 재생되면서 관람객들의 마음을 처참하게 만든다. 일전에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와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인이 과거 일제의 폭력을 재현해 놓은 역사적 장소를 탐방하는 일은 어떤 생각을 불러올 수 있을까? 말로 잘 설명 못할 그 감상을 경험해보려면 베트남에 갈 기회가 있을 때 호치민시의 전쟁박물관에 찾아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곳에는 한국군들이 베트남 양민들을 상대로 저질러 놓은 끔찍한 학살이 지워질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아마 그 박물관을 거닐며 내가 가졌던 생각이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거닐며 가졌던 생각과 비슷했을 것이다. 어쨌든 오오무라 교수를 비롯해서 일본에는 일제의 한국지배를 공공연하게 반성하는 지식인이 많이 있다. 한국에 베트남전을 반성하는 지식인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이것은 오래오래 묵혀서 생각해볼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한국인의 위치에서 생각해보고 베트남인의 위치에서 생각하면서 지금 바로 무엇인가를 행동하는 일이다. 일본에는 그런 지식인이 많지만 한국에는 그런 지식인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는 그 즉각적인 행동을 주체적 관점에서 문학적 실천으로 보여주려는 사람들의 연구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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