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전체 세계문화유산 기품…그 뿌리 깊숙이 백제정신 숨쉰다

백제의 영향을 받은 사찰로 세계문화유산인 간고지(元興寺)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백제의 영향을 받은 사찰로 세계문화유산인 간고지(元興寺)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나라(奈良)현은 역사·문화의 보고다. 고대 한·일 교류사의 거대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라현의 자랑거리가 더 있다. 이들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세계유산은 모두 14건(문화유산 11건, 자연유산 3건). 이 가운데 ‘호류지(法隆寺) 지역의 불교 건조물’, ‘고도 나라의 문화재’, ‘기이산지(紀伊山地)의 영지와 참배길’ 3건이 나라현에 있다. 나라현의 자부심의 바탕이다. 주목할 점은 ‘호류지 지역의 불교 건조물’과 ‘고도 나라의 문화재’가 지닌 역사성이다. 고대 백제로부터 전래된 불교문화와 당시 도래인들의 선진 문물 및 기술의 전수가 13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나라현의 세계문화유산의 뿌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현의 세계문화유산을 돌아보노라면, 문득 고대 일본문화의 원류인 공주· 부여의 역사유적지구가 최근에서야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추진되고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나라현 나라시의 나라현청을 방문하면, 색다른 관람 코스가 있다. 현청사의 옥상이다. 일본 속의 백제 역사·문화 탐사를 위해 나라현청을 방문했을 때도 현청의 관광과 직원은 “시간이 있으면 옥상에 가보자”며 정중히 취재진 일행을 안내했다. “왜 그러지?”라는 의문도 잠시, “아!”하는 탄성이 먼저 나왔다. 한 눈에 잡히는 고도 나라현의 풍경은 한마디로 아름다왔다. 근경과 원경의 조화가 경이로왔다. 청사 주변으로는 잔디밭과 노송의 푸르름을 뽐내는 공원이 이어져 있고 송림 사이로 사찰의 지붕과 오중탑의 머리 부분이 방문객을 환영이라도 하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옥상을 한바퀴 돌아도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곳곳에 불교 건조물이 우뚝 솟아있고 그 장엄한 역사 건축물을 호위라도 하듯 송림이 우거져 있다.

저 멀리로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들이 곧게 지평선을 이루고 있고 그 안이 나라시의 분지 평원이다. 그 옛날 고대의 왕족은 나라 땅의 곳곳을 물색한 끝에 이 터에 도읍을 정했으리라. 산과 강이 방벽을 이루고 분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곳에 도읍을 정했던 고대 백제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가지 풍경은 신·구(新·舊)의 대비와 조화가 고도의 품격을 느끼게 한다. 마치 잘 정돈해 놓은 것처럼, 유구한 역사에도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는 역사 유적들이 잘 보존돼 있고 그 주변으로 현대적 모습의 시가지들이 펼쳐져 있다. 고대와 현대의 어울림이 어색하지 않다. 더군다나 다양한 역사 유적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나라현청의 옥상으로 이끈 의도를 이해할만 했다. 단지 풍경의 아름다움의 그치지 않고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의 기품을 한껏 드러내고 있음을 절로 느끼게 된다. 취재진을 바라보는 현청 공무원의 미소에서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지상으로 발을 옮기면 수 많은 사슴들이 먼저 반긴다. 나라현의 공원에는 사슴들이 자유롭게 방목되고 있다. 예로부터 사슴을 ‘신의 사자’ 여겨 소중하게 다루고 있고 사슴들이 평화롭게 사는 나라공원은 관광객들에거 명소 중의 명소다. 동서 4km, 남북 2km의 공원에는 진다와 송림이 사계절 녹색 광채를 뿜어낸다.

사슴들과 함께 돌아보는 나라 땅의 산책은 고대 백제문화와 함께하는 세계문화유산의 탐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93년 등재된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조물은 호류지와 호키지(法起寺)로 구성돼 있다. 또 지난 93년 등록된 고도 나라의 문화재는 특별사적인 헤이조(平城宮) 궁터, 국보 건조물이 있는 사찰과 신사인 도다이지(東大寺), 고후쿠지(興福寺), 야쿠시지(藥師寺), 도쇼다이지(唐招提寺), 간고지(元興寺),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및 특별천연기념물인 가스가야마(春日山) 원시림으로 이뤄져 있다. 호류지와 도다이지본보 10월 12일자 외에도 고후쿠지, 야쿠시지, 간고지 등은 한결같이 일본 내의 대표적인 백제계 불교 건조물로 꼽힌다. 나라현의 세계문화유산의 원류가 곧 백제인 셈이다.

고후쿠지는 백제 왕족의 후손인 후지와라 가마타리(藤原鎌足)의 부인이 남편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당초에는 교토에 세웠으나 710년에 지금의 터로 옮겨졌다. 후지와라는 신라 왕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백제의 후손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후쿠지에 들어서면 높이 51m의 오중탑이 우뚝 서 있다. 오중탑은 일본 내에서 두 번째로 높다. 동금당(東金堂)과 북원당(北圓堂), 남원당(南圓堂), 삼중탑(三重塔), 국보관 등에는 문수보살상, 약사삼존상, 석자삼존상, 불공견색관음상 등 국보 문화재가 26점이나 된다.

가스가타이샤 역시 후지와라 가문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후지와라 가문의 조상 신주(神主)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후지와라가 백제계 출신이라는 설을 감안하면 백제신을 모시는 신사라는 가설이 성립된다. 신사에는 입구에서부터 경내에 이르기까기 족히 2000여개의 석등이 도열해 있다. 매월 2월과 8월의 14, 15일, 석등에 불을 밝히는데 일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야쿠시지는 680년에 덴무(天武天皇)천황이 발원해 세웠으며 백제의 고승, 행기스님이 출가한 절로 알려져 있다. 718년 후지와라쿄(藤原宮)에서 헤이조쿄(平城宮)로 옮겨졌다. 국보 약사삼존상(藥師三尊像)은 백제 계열의 불상 조각가가 만들었다. 간고지는 백제계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아스카에 세웠던 아스카데라를 헤이조쿄로 옮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소가노 우마코는 토착종교 세력을 물리치고 불교전쟁(587)에서 승리, 일본을 불교문화 국가가 성립한 인물이다.

이들 세계문화유산 외에도 ‘아스카·후지와라 궁도(飛鳥·藤原 宮都)’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올라 있다. 아스카문화와 후지와라 시대는 백제의 불교문화를 수용해 찬란한 고대 문화를 꽃피웠다. 그 영향을 받은 사원과 당시 궁인들의 고분이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세계유산의 정식 등재를 앞두고 있다.

고대 백제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 나라현의 불교건조물과 문화재가 일찌감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있지만 우리의 백제 고도는 이제서야 세계유산 등재가 본격화되고 있다. 지난 6월에 공주의 수촌리, 송산리, 공산성, 고마나루 지구와 부여의 부소산성, 정림사지, 부여나성, 구드래, 청마산성 지구 등 9개 지구가 묶여져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기재됐다. 정식 등록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장정목록 확정 후에도 최소 3-4년의 준비 기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할 때 이르면 2012년이나 2013년께 등재 신청이 가능할 전망이다. 일단 등재 신청을 낸 뒤 ‘불가’ 판정을 받으면 재도전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치밀한 준비와 전략이 요구된다.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는 중국, 일본 등 주변국가들과의 국제적 문화, 기술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적, 문화사적 보편적 가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적지구로 평가된다. 하지만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격이면서도 그 역사적, 학술적 보편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는데는 한 발 늦은 감이 있다. 일본 나라현의 세계문화유산을 돌아보면서 다소의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용 기자 yong6213@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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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현의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고후쿠지(興福寺)는 백제 왕족의 후손이 세운 사찰로 알려져 있다.
나라현의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고후쿠지(興福寺)는 백제 왕족의 후손이 세운 사찰로 알려져 있다.
평성궁 터의 정문. 나라현이 ‘평성천도 1300년제’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매우 웅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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