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가난 그리고 아름다운 용기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난한 휴머니즘’

동트는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얼마나 엄숙한 신비로 세계는 깨어나는가. 빛, 물결은 점차로 빛을 얻으면서 눈을 뜬다. 바다는 고요하다. 조금씩 확장되는 빛의 더미들. 멀리 떠있는 몇 척 원양어선이 마침내 제 실체를 얻는다. 순간순간 웅장한 생의 존엄이 차오른다. 아침마다 이런 경이가 되풀이 되듯 삶의 매순간은 위대한 존엄으로 출렁인다.

하지만 그 아침을 발견하는 자는 얼마 없다. 모두 부산한 아침을 정신없이 맞이한다. 하루는 해내야 할 일들로 밀어닥친다. 경제적 성장만이 유일한 진보처럼 여겨지는 아침인 것이다. 특히 편중된 세계의 부는 참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뇌 자체를 무화시킨다. 분리와 차별적인 사회 구조는 우리를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로 만들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쯤 발을 멈추고 그 심연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자인 아리스티드는 아이티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싸워온 신부로 네 번이나 아이티의 대통령이 되었다가 네 번 모두 군사 쿠데타로 쫓겨나야 했던 지도자다.

‘가난한 휴머니즘’은 몇 번이나 정치적 망명길에 오르면서도 민중의 희망으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지도자로, 개인의 존엄에 대한 신념이 그 뼈를 이룬다. 이 책의 부제는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로 되어 있다. 그가 전 세계에, 지구화 시대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띄우는 아홉 통의 편지는 인간다움과 존엄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진정한 필요와 권리를 조목조목 올곧게 따진다. 하여 진정 중요한 건 무언지, 이 새로운 세기의 메시지를 담는다.

지구는 전례없는 경제적 성장을 구가하고 있지만 60억 인구 중에서 13억의 인구가 하루 1달러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30억의 사람들이 하루 2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간다. 세계 시장을 통합하는 자유무역을 받아들인 가난한 나라들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지구화된 경제체제는 결코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가난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가난한 민중들을 보면서 늘 의문했다고 한다. 저렇게 적게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길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길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는 세 번째의 편지에서 네 살짜리 플로랑스와의 대화를 적고 있다. 커다란 양동이에 수영하러가는 플로랑스에게 묻는다. “수영장이 크니? 작으니?” “아주 아름다워요.” 그는 다시 물었다. “콜라가 좋으니? 술이 좋으니?” “난 주스가 더 좋아요.”

이 대화에서 그는 플로랑스가 만들어내는 제3의 선택에서 깨닫는다. 그건 꾸밈없는 자연적인 방식의 응답으로, 두 가지의 선택만이 주어졌을 때도 제3의 길을 창조할 수 있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3의 길을 창조하는데 오랜 경험을 갖고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날마다 죽음과 맞댄 채 살고 있지만 수백 년 동안 그런 방식으로 생존해온 사람들. 하여 그는 세계 여러 곳의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는 ‘인간애의 박물관’이라고 이해한다. 체념하면서 죽는 방법과 폭력적 폭발을 통해 죽는 방법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바로 ‘평화를 위한 집단적 결집’이라고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사회 또한 플로랑스가 내린 제3의 선택이 얼마나 절실한가 말이다.

존엄한 가난은 위대한 자연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자발적인 희망의 표명은 이를 분명히 인지하는 데서 오는 용기일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신념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아리스티드 재단’과 ‘라팡미 셀라비’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 혁명을 돕고,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며 아이티의 미래를 키우고 있다. 이 민중운동과 그가 체험한 사람들과 생각들, 희망과 도전 또한 고스란히 우리가 나눠야 할 아름다움이리라.

그는 자본주의는 우리 별을 집어삼키는 기계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결국은 모든 페이지마다 희망과 도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광활한 비공식 분야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진정한 활기를 확신한다. 전 세계를 다니는 동안 영성에 대한 배고픔, 정치에서의 도덕에 대한 배고픔, 인간애의 인지에 대한 배고픔, 신의 존재적 존엄에 대한 배고픔이 모든 사람들의 똑같은 질문인 것을 알고는 놀랐다고 그는 술회한다. 먹을 것이 넘쳐도 영혼의 배고픔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저자의 신념과 용기는 종교에 기인한다. 그리스도의 선물은 다름 아닌 바로 인간다움이며, 그가 우리의 삶 속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으며, 어떤 불행에도 그의 평화로운 위엄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마냥 미소짓는 아이처럼, 먹을 게 없을 때에도 아기를 사랑으로 돌보는 엄마처럼,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능력처럼, 폭력에 맞서는 용기 있는 행동처럼 말이다. 그는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신념을 제시한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왔으며, 이 사랑이 위대한 힘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선물 같은 것, 원형적인 생기가 아닐까. 우리가 자본의 논리를 선택한 후 잃어버린 것들 말이다. 모든 거래를 숫자로 환원시킬 때, 인간적인 것을 모두 사라지게 했을 때,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그는 묻고 있다.

카리브해에 있는 작은 나라,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가난하고 문맹률이 높은 나라,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 아직도 끊임없는 독재와 내란에 시달리며 정치적 안정이 소원한 나라. 그러나 그는 아이티에 비참한 현실과 열악한 도로, 벌거벗은 숲만 볼 것이 아니라, 아이티 민중의 힘과 존엄, 아이티 땅의 아름다움, 풍부한 문화까지 바라보기를 원한다. 통계를 넘어선 곳. 곧 문화적 요인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자살이야기가 없고, 될 수 있는 한 음식을 나눠먹는 전통, 더 이상 들어설 수 없이 꽉찬 픽업트럭(대중교통수단)에도 한 자리를 더 만들어낼 수 있는 힘. 풍부한 유머와 온화한 성격, 연대감 등 통계학자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비공식적 경제권에서 살아가는 힘, 그것을 그는 영혼의 부유함이라고 부른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성경구절이 이 모든 진리를 함축하고 있으리라.

다음과 같은 아이티 속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이티 사람들은 축제를 돈과 바꾸지 않는다.” 이는 문화를 돈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뿌리를 기꺼이 떠안으면서 다시 긍정해내는 힘. 이는 온통 문화산업이 되어버린 우리네 현실에 또 어떤 울림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시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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