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사회에 순응하십니까

지행네트워크의 젊은 지식인들이 쓰고 역시 지금 한창 상종가를 올리고 있는 젊은 지식인들의 출판사 ‘난장’에서 펴낸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를 책상 위에 펼쳐 놓는다. 그 젊은 지식인들은 조금만 현재의 문학과 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오창은, 이명원, 하승우가 지행네트워크의 주인공들이고 김남시, 김상운, 양창렬, 이현우가 출판사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이름을, 그중 두셋이라도 아는 사람은 어느정도 지금 한국 인문학계의 흐름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들이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 책의 결론을 짧고 명확하게 말해야겠다. 자본주의 제도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 ‘지식협동조합’을 만들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긴 우회를 해야 할 듯하다.

스스로를 순응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회에서 웬만큼 성공한 탓에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거나 그 성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독자적이어서 새로운 삶의 행로를 모색하는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물론이고, 이 글을 읽는 독자는 필경 순응주의자가 아닌 삶을 살기 위해 지금 순응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에는 묘한 이율배반이 있다. 순응하지 않기 위해 순응하는 알리바이의 삶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라면, 그 순응은 이미 사람들의 뼛속 깊이 배어버린 무의식적 습관과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순응을 강요하는 제도의 수혜자가 되어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내가 순응하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의 순응을 요구한다. 진정으로 순응하지 않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의 순응을 요구하는 나의 비순응이란, 따지고 보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이데올로기가 이 사회적 제도 속에서 사는 모든 존재에게 운명처럼 덧칠해버린 순응의 또다른 형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그것을 큰타자의 규정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들뢰즈가 정신분석학의 외디푸스론을 크게 비판했던 것도 이 규정성의 구속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니라는 선언은 그 선언 이전의 어떤 국면에 대한 발본적 사유가 없는 한 그다지 주의해 볼 필요가 없는 말일 것이다. ‘선언 이전의 어떤 국면’이란 그 선언이 실제적인 힘으로 물화될 수 있는 현실적 차원의 어떤 움직임이 사회적 제도의 저 캄캄한 무의식을 뒤집어버리는 사태로 얽혀드는 순간이자 장소를 뜻한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선언 이전’이란 우선 ‘제도 이전’을 뜻한다. 선언은 모종의 피치 못할 사태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순응을 강요하는 제도와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다. 가령, 광우병 걸린 소가 없었다면 미국 쇠고기 수입에 대한 대대적인 반란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선언 이전’이 의미심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선언 이전’은 그러므로 순응 이전과 같은 말이며, 순응의 제도가 억압하고 배제하고 망각해버린 삶의 숨결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는 시공간이다. 사람들이 사회적 제도의 억압을 견디며 끝까지 살아보겠다고 마음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의 어떤 기억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것을 되살리며 우리는 현실을 살아 나간다.

‘제도 이전’을 지금 되살리는 것은 그러나 단지 그 ‘이전’을 단순히 상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상기(recollection)는 과거의 어떤 시공간을 단순 복원하는 것이다. 이 상기에는 그러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 힘은 있어도 그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힘은 없다. 상기하는 사람들은 그저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흔히 미래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바로 이 경우를 지칭한다. ‘제도 이전’을 지금 되살리는 것은 ‘반복(repetition)’이라고 불리는 삶의 형식을 미래의 시간과 연결시키는 행위이다. 과거는 반복되지만 단순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때론 눈에 띄는 차이가, 때로는 거의 변화를 느낄 수 없는 차이가 반복과 함께 실현된다. 중요한 것은 ‘차이’이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지나간 시간보다 더 나은 시간 속에 놓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더 나은 앞날을 가능케 하는 과거의 진정한 힘이 드러난다. 미래가 허공에 수놓아진 관념이 아닐 수 있는 것이 그 미래에 대한 상상을 가능케 한 경험적 과거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그 과거를 저 도래할 시간 속으로 차이화하면서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는 경험적 과거의 상상적 재배치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앞에서 ‘선언 이전의 국면’에 대해 “실제적인 힘으로 물화될 수 있는 현실적 차원의 어떤 움직임이 사회적 제도의 저 캄캄한 무의식을 뒤집어버리는 사태로 얽혀드는 순간이자 장소”라고 썼던 것은 바로 그 ‘과거로서의 이전’이 미래를 예감케 하는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래가 없는 사람은 삶이 없는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가 없는 사람은 미래 뿐만 아니라 현실도 없는 사람일 것이다.

지행네트워크의 젊은 지성들이 그 미래를 예감하기 위해 ‘지식협동조합’을 가져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과거가 있기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그 과거는 그들 개인의 과거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과거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역사적 과거이다. 원시공동체사회이든 근대적 공동체로서의 어소시에이션이든, 협동조합은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한 삶의 공동체이다. 농민들을 착취하고 있는 NH(농업협동조합)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농협 얘기가 나왔으니 짚어보건대, 관 주도의 협동체가 얼마나 강제적으로 순응주의자들을 양산하는 곳인지는 이미 한국사회가 너무나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일제말기의 대동아공영론을 밑받침한 이론도 ‘동아협동체론’이었다. 공동체 사회에 대한 경험적 상상인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공감의 공동체, 2009, 난장)는 ‘순응과 관련된 그 이율배반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지식공동체를 모색하는 젊은 지성들의 활동보고서이자 사유의 보고서이다. 부러울 수밖에 없다.

참고로 말해두면, 상기와 반복을 구별해둔 철학자는 키에르케고르와 들뢰즈이다. 이 개념으로 현대시의 형식적 특징을 분석한 책이 월트 휘트먼과 월러스 스티븐스 그리고 존 애쉬베리를 다룬 Krystyna Mazur의 Poetry and Repetition(Routledge, 2005)인데 이 책은 아쉽게도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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