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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의 행복한 책읽기-고진하 ‘영혼의 정원사’

2009-10-08기사 편집 2009-10-07 06:00:00     

대전일보 > 정치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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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 영혼에 물을 주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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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무수한 문을 열고 닫는다. 종일 여닫는 만남으로 이 시대의 삶은 조화를 파는 꽃가게처럼 현란하다. 문명의 속도를 타고 오가는 그 소통의 진정성은 과연 얼마만큼일까. 그 여닫는 문틈으로 우리 영혼의 정원을 물끄러미 내다볼 수 있다면 이 별은 훨씬 아름답지 않을까. 그 푸른 정원 속에선 우리가 이 지상에 머무는 까닭, 좀 더 자신을 비워낼 만한 모든 이유가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지금 내 영혼의 정원에는 무슨 꽃들이 피어있을까. 제 마음의 정원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자신의 삶을 늘 주시하고 고뇌하는 중일 것이다. 자신의 텃밭을 가꾸는데 있어 세심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맑은 향기를 얻는다. 하지만 제 영혼의 텃밭에 무엇이 자라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다. 아니 잡초 한 잎 자랄 수 없는 황무지로 내버려두고 있는 건 아닐까. 그 황무지에 부는 마른 바람은 현실이라는 물리적 세계에 그대로 불어온다. 영혼은 비물질의 세계라 하지만 결코 현실과 분리될 수 없는 현실의 이면인 것이다.

이 책은 고진하시인의 명상 에세이집이다. 일찍이 신학을 전공하고 영성에 깊이 접근한 저자가 선각자들의 오래된 지혜를 함께 나누면서 행복한 순례를 제시하고 있다. 예수나 붓다, 노자, 에크하르트, 파스칼, 데이빗 소로우, 칼릴 지브란 등 영성가들의 깨달음과 즐거운 우화들, 잠언, 그리고 시인의 직관적인 사유와 언어들이 우리 주변을 환하게 밝혀준다.

저자는 이를 통해서 내 영혼의 정원을 돌볼 정원사는 나 자신뿐임을 강조한다. 결국 이 생이라는 것도 영혼이 성장하기 위한 훈련장 같은 것. 이번 삶에서 영적인 진보를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이 별에 모여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든 손해, 모든 고통과 절망도 진정한 자신이 되는 과정이며 현재인 것이다. 그것을 수용하는 데는 무엇보다 시간을 들꽃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또한 풋풋한 정원을 가꾸는 첫 번째 작업은 설레임, 즉 스스로 가슴 뛰는 삶을 누리는 게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가치를 경제적인 수치로 환산한다. 눈에 보이는 잣대만을 가지고 매사 효용적인 가치를 논하고 판단한다. 하지만 진정한 생명은 그렇게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다. 참된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원에 어떤 꽃이 피어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근원적인 우주, 궁극적인 존재의 환희는 물질이나 형식적 조건이 아닌 내면의 광대함에 있음이다. 사는 동안 어떻게 영혼을 가꿀 수 있을까. 영혼이란 미세한 눈길과 세심한 손길에 의해 향기를 키우는 꽃술인 것이다.

이 책에서 고진하 시인은 영혼에 물을 주는 50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내면 탐구, 한가로움을 누리기, 마음에 파수꾼 세우기, 호흡을 주시하기, 의미 부여하기, 기쁨으로 바라보기, 침묵을 창조하기, 신성을 찾는 것, 자연을 존중하는 것, 무심, 깨어남, 자족, 신뢰, 감사, 잠재력, 새로운 눈, 조화와 균형, 고대의 지혜, 가벼움, 기도, 춤을 추는 일, 무소유, 미소, 은신, 경청, 초월 등이 그렇다. 이러한 마음자세에 대한 성찰과 실천이 영혼의 나무를 손질하는 정원사의 삶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비움이야말로 자비의 전제조건임을 명쾌하게 집어낸다.(「무심으로 행하라」) 남의 결핍을 향해 나아가는 ‘자비’보다는 오히려 ‘무심’을 더 차원 높은 것으로 여긴 에크하르트의 철학과 만물을 낳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하지 않으며, 공덕을 이루고도 그 공덕에 거처하지 않는 자연적 삶을(도덕경) 비춰주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서 존재의 유일성을 자각하고, 조물주가 지어준 제 고유의 본성을 충실히 완성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본연이 아닐까.

영혼을 가꾼다는 건 일상의 모든 틈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결코 그건 명상처를 찾아다니거나 특별한 스승을 만난다고 해서 발견되는 세계가 아니다. 종일 여닫는 일상 속에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될 영혼을 단련하는 지혜들이 샘물처럼 흐른다. 무수히 열고 닫는 현상의 문틈 사이로 그 숲의 신비와 마주치는 것. 다만 그 내면의 숲을 오래 주시하는 무한한 눈동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삶은 자유롭게 피어나고 풍요로운 정원, 곧 자신만의 향기로운 우주를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삶은 순례이다. 순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튼튼한 신발과 지팡이, 모자 등일까. 순례에 가장 큰 필요와 도구는 사랑이다. 사랑은 존재의 궁극이며, 영혼의 정원을 적시는 단비이며 또한 햇살인 것이다. 사랑의 반대는 두려움이다.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평생을 소비한다고 한다.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모든 상황은 두려움 대신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신이 마련한 완벽한 기회다’라는 메리앤 윌리암스의 말처럼 두려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곧 영혼의 정원을 가꾸는 일일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정원들을 가꾸는 작업을 통해 결국 존재의 신성을 발견하고 회복해내는 것, 그것이 삶이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영혼에게도 물을 줄 수 있는 넉넉한 정원사일 수는 없을까. 신은 내 안에서 꽃피고 향기를 뿜는다.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내면이란 곧 영혼이 둥지를 트는 자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몇 년째 계속 같은 동네길을 도는 걸인이 있다. 하루에 몇 번씩 마주친다. 땟물과 냄새 때문에 꺼려지지만 이상하게 낯설거나 배척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말이 없고 늘 한곳을 주시하며 담배를 물곤 한다. 그저 늘 풍경처럼 존재했다. 낡은 보퉁이를 끌어안은 그녀를 지나칠 때마다 그녀가 주시하는 곳이 어디인가 괜히 궁금해진다. 그녀는 제 영혼의 정원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아득한 과거일까. 머나먼 우주의 끝 어디쯤일까. 이 사회의 부적응자로 지나치기에는 무언가 그녀가 주는 생명의 힘은 특별했다. 아마 그녀도 내 영혼의 정원을 내다볼 수 있는 문틈이었던 것이리라.

좀더 천천히, 좀더 유심히 문밖의 풍경을 내다보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거기서 싱그러운 물기를 품고 있는 영혼의 정원을 만나기를. 그것이 우리 생명의 가치를 얼마나 눈부시게 할 것인가. 그 가치에 눈을 뜨는 순간 영혼은 젊어진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탐구하는 과정은 자유로운 여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창조적 젊음은 '바로 이 순간'의 깨달음에 있다. 하여 뚜벅뚜벅 나 홀로의 발소리는 더 당당해질 것을.

“이 마음의 행로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당신 자신이 우주의 한 송이 꽃이며 창조의 젊음을 누리는 신의 파트너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고진하 시인의 고즈넉한 권고이다.

<시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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