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의 합리성 넘어선 인류의 삶

나카자와 신이치는 철학과 종교를 결합시킨 독특한 인문학자이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니, 도쿄대학 종교학과에서 공부하고 네팔에서 티벳 밀교에 대한 연구와 수행을 진행했던 경험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의 책이 ‘카이에 소바주’라는 타이틀 아래 모두 여섯권의 기획물로 번역되어 나왔다. 모든 책을 여기에서 소개할 수는 없고, 이 책들 중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동아시아, 2004)에 대해 오늘 살펴보기로 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핵심은, 등가의 가치를 전제하는 교환의 원리가 비인간적 관계를 야기시키고 있는 현재, 교환이 아닌 증여의 원리를 통해, 이를테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주고받음의 경제를 통해 사랑의 열락으로 가득찬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사랑과 경제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까? 흔히, 사랑은 정신적이고 경제는 물질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정신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영혼의 저 깊은 울림과 관련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에 비해 경제가 물질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현실적인 직접적 욕구와 관련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설명은 가장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이해의 차원에서 가능한 것일 뿐이다. 왜 사랑에 물질적인 욕망이 없겠으며, 경제에 타자를 향한 애정이 없겠는가. 이 복잡한 상호관계를 인간의 실제적 생활은 심도 있게 고려하기 힘들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종착지라는 생각은 이제 경우 200년 정도 된 가치관일 뿐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보면, 애초에 결혼은 권력과 부, 명예 등의 이른바 ‘순수하지 않은’ 의도들의 결합이었다. 그랬었는데, 근대시민사회가 자신들의 이전 시대와 대비되는 가치관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사랑과 결혼은 필연적인 원인과 결과의 관계여야 하는 것으로 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랑과 결혼에 금전적인 물질의 이념이 개입되는 사태가 비판되는 것은 시민사회의 이념이 승리한 결정적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근대의 가치관을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우리는 다만, 그 가치관의 역설적 결과로서 순수한 정신적 사랑과 순수하지만은 않은 물질적 삶이라는 관념을 부둥켜 안고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 가치관이 그것 이외의 사랑과 결혼을 완전히 봉쇄해버릴 수는 없다. 지금도 돈, 명예, 권력에 패를 건 결혼이 얼마든지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재벌, 정치가, 고위 관료들의 이른바 상류사회가 자신들의 핏줄에 대한 동종 재생산의 그물 속에 어지럽게 얽혀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 동종재생산이 일종의 근친상간이며, 근친상간이야말로 인류를 캄캄한 무능력의 동물들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은 이미 인류학에서, 생물학에서 직간접적으로 주장되고 증명되어 온 바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종재생산의 근친상간지배자가 그들 이외의 사람들에게서 온갖 방법으로 수취해가는 능력들 덕택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결국 수취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수취해가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증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수취자와 피수취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능력의 교환이 제대로 된 등가교환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교환경제에서 일하는 사람의 능력이 온전히 대우받는 것는 아직은 요원한 일인데, 이 일방적 역학관계 하의 교환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피수취자들은 그 교환의 체계를 살아가면서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증여하는 존재들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주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증여가 주어진 것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교환에 사로잡힌 불모의 근대자본주의를 지금까지 지탱시켜 온 중심축의 하나인 셈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 근대적 교환의 불모성이 왜 사회 전체를 부패시키고 있으며 그래서 결국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과도기적일 수밖에 없는 체제인지를 구체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제시한다. 불모성의 원인은 ‘교환’이며 대안은 ‘증여’이다. 사람이 물(物)을 매개로 해서 맺는 관계는 ‘교환’, ‘증여’, ‘순수증여’의 세 가지이다. 교환은 합리적인 경제활동이고, 증여는 영혼의 활동을 포함하는 경제활동이며 순수증여는 아무런 보답이 없는 신성한 경제활동이다. 교환이 등가교환의 원리(자본주의를 가능케 한)를 따른다면, 증여는 가치가 증가한 답례를 유도하는 행위이다. 이때 증가한 가치란 ‘하우’와도 같은 힘의 유동성을 의미한다. 가령, 생일선물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되는 예상치 않았던 기운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 기운이 잉여의 물질적 가치와 관련되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순수증여는 증여와 교환의 고리로부터 일탈된 증여이다. 이것은 모든 증식의 바탕을 이루는 순수한 가치 생산이다. 저 대지가 인류에게 주는 무상의 선물과 같은 신성한 증여가 여기에 해당한다. 인간은 그 순수증여의 토대 위에서 증여와 교환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모스의 인류학, 맑스의 정치경제학,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결합시켜서 나카자와 신이치는 교환의 합리성을 넘어서 있는 인류의 삶을 제시한다. 그 삶은 모든 인류가 합리적 교환의 자본주의적 계산이 야기한 창백한 소외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삶이고 사랑의 열락으로 충만한 사회이다. 그것은 계산적 이성이 포착할 수 없는 신성의 세계이며 교환 경제가 야기한 금전중심의 사물화되고 소외된 삶을 신적인 사랑의 열락으로 치유하는 세계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 증여의 세계가 인류에게는 아주 오래된 경제 체계였다는 사실을 인류학적 실증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증여의 경제체제가 파괴된 것은 인간적 이성에 의해 증여의경제에 내재되어 있는 신성성이 축출되기 시작한 근대자본주의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자본주의적 교환경제를 넘어서는 방법이 증여의 경제라는, 인류의 오래된 가치 생산 방식 속에서 찾아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삶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하게 된다. 그 가능성을 추구하는 일은 그러므로 독자들 모두 자신들의 마음에 신성성이라는 묻혀버린 능력을 복원해내는 일이 될 것이다. 증여는 삶의 신성한 기운을 고무시키고 신나게 하는 계기이니까 말이다. 지금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직 자본의 위력에 기대고, 그것에 억압되어 다른 삶을 꿈꿀 수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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