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사랑을 향한 유쾌한 신비

삶은 사랑을 향한 유쾌한 신비입니다

- 데이비드 호킨스 ‘의식수준을 넘어서’

첨단 과학기술에 기반한 21세기, 그러나 극단으로 치닫는 물질문명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존재의 모순과 실존에 대한 의문은 인류의 전체 역사뿐만 아니라 한 개인에게서 있어서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혼란이다. 생태계의 교란과 가치의 상실은 문명이 결코 행복일 수만은 없음을 확인시켜준다. 하지만 이 불편함 속에서 인류가 가진 생명과 그 신성과 신비는 언제나 하나의 희망으로 남는다.

예전의 우리 문화에는 무수한 제의가 살아있었다. 이는 곧 지극한 삶을 의미한다. 함부로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기억해내려는 경외에 다름 아니었다. 귀신이나 자연, 사물, 새벽 정화수나 성황당 돌무더기조차도 마음으로 섬기려는 극진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의 가치가 거의 상실된 현실, 함부로 치닫는 욕망이 만든 소통불능의 풍경이 하루하루 생경스럽다.

우리는 얼마나 정직하게 생을 바라볼 수 있을까. 이 책은 에고의 기원과 생존의 본능, 한계를 타고난 이 에고의 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고는 생물학적 유산이다. 에고는 생존을 위해 자기이익, 정복, 다른 유기체와의 경쟁에 관여하고 동시에 호기심과 탐색 등 학습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생존 메커니즘은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의 진화로, 이는 다시 지성의 성질로 정교해졌다. 이는 다시 다양한 내면성을 이루면서 심리적 종교적 세계를 형성하고, 인간을 영적 의지의 존재에 이르게 한다.

‘의식혁명’,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저자인 데이비드 호킨스는 ‘운동역학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의식 체계를 과학적으로 입증해낸 영성가이다. 인간 경험을 의식 진화의 관점에서 재맥락화하고, 지속적 근원인 내재적 신성의 표현으로 통합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의식 수준을 1부터 1000까지의 척도로 수치화한 ‘의식 지도’를 보여준다. 수치심, 죄책감, 욕망 등으로 대변되는 낮은 수준으로부터 사랑과 평화, 깨달음에 이르는 높은 의식 수준까지 대별, 초월되어야 할 다양한 수준을 분석하면 영적 진화를 뒷받침하는 일정한 원리들이 저절로 드러난다고 그는 강조한다.

수치심과 절망(의식수준 20이하), 죄책감과 보복적 증오(30), 무감정(50), 슬픔(75), 두려움(100), 욕망(125), 분노(150), 자부심(175), 용기(200), 중립(250), 자발성(310), 수용(350), 이성(400), 사랑(500), 무조건적 사랑, 기쁨, 황홀경(540-599), 평화, 지복, 빛(600), 참나 각성(700-849), 완전한 깨달음(850이상), 초월(1000) 등으로 의식은 17단계로 수치화된다. 낮은 의식 수준에서 생명은 매우 경쟁적이고 이기적이다. 인간 내부에서 원시적 에고의 지속은 ‘자만심’이라는 자기애적 핵심으로 지칭되는데. 이것은 200이하의 수준에서 타인의 권리에 대한 무시, 남을 잠재적인 적으로 보는 원시성, 강한 소유욕과 공격성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의식 수준 200에 이르러서야 생명의 본성은 보다 조화로워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성적 돌봄이 나타나고, 무리에 대한 충실성, 타자와의 동일시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관계, 사회화, 놀이, 가족 및 부부 결합 같이 공동체 활동을 통한 생존, 그리고 공동의 목표를 위한 집단적 협력이 시작된다. 따라서 의식 수준 200은 중요한 정신적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200은 용기의 수준으로 이 영적 에너지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경험을 크게 바꿔 놓는다. 이것은 힘의 부여, 곧 의지가 작용하는 수준이다. 용기는 탐험, 성취, 결단의 지대인 것이다. 낮은 수준들에서 세계는 슬프고, 유혹적이고 혹은 좌절을 안겨주는 곳으로 보이지만 용기의 수준에서 삶은 다시 도전적이고 자발성을 얻는다. 예를 들어 200 수준의 사람은 새로운 직업기술을 배우며, 교육을 통해 성취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두려움이나 성격 결함을 직시하면서도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의식 수준 200 이하의 사람들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장애가, 진정한 힘의 첫 번째 수준으로 진화해온 이들에게는 자극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의식 수준 200 이하에서 앎은 부정적 감정에 지배되지만, 200과 400 사이에서 점차 긍정적이 된다. 그러다가 의식 수준 500에 이르면 큰 패러다임 도약이 있는데, 바로 사랑이다. 여기서부터 아름다움, 평화, 내적 고요의 매력이 중요해지고 영적 원리가 지배적이 된다. 낮은 의식 수준에서 사랑은 조건적이며 소유, 정열, 낭만, 욕망과 동일시되지만 높은 수준의 사랑은 그 완전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보상하는 사랑이며, 타인의 복지와 행복에 관심이 많아진다. 사랑은 곧 신성의 한 성질이며, 자발적 용서와 자발적 겸손에 의해 진실로 현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 전 인류의 78% 가량이 의식 수준 200이하라고 측정한다. 이는 아직도 원시적인 동물 본능, 동기에 지배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게 아닐까.

물론 그의 연구가 무조건적일 수 없으며, 이러한 단계로 대별하여 인류의 삶, 생명의 신비를 규정지어버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생명은 보다 복합적이며 연기적인 세계로 다양하면서도 신비 그 자체로 어떤 형태로든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초월 가운데서도 본래적인 고독을 놓아버릴 수 없으며, 어떤 투쟁적인 에고도 본래적인 연민을 아주 버리지는 않는 게 인간이라는 신비가 아닐까.

그러나 단절과 소외가 심화되고 불연속적인 이 시대에 우리에게 꼭필요한 가치와 여러 덕목을 이 책은 제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깨달음을 지향하면서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정신적 존재임을 믿을 때 물신화된 이 사회를 극복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영적 지향이 있는 사람은 삶의 모든 경험을 소중이 여기고, 각각의 경험을 영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기회로 본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의식 수준을 초월하는 데는 인간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의지는 영적 작업의 모든 기능 가운데 가장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영적 의지`가 담긴 의식수준의 단계가 `용기`라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겉모습 뒤에 있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빛나는 본질을 지향하는 긍정적인 선택이 우리에게 있음이다. 결국 현실을 해석하고 위치하게 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며, 직면하는 세상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지는 곧 신성에로의 초대가 아닐까. 여기서 삶의 성찰이 시작되는 것.

하여 삶은 언제나 진실한 사랑을 향한 유쾌한 신비, 유쾌한 연습일 수 있지 않을까.

<시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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