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田 아름다운 이야기’-①‘김밥 할머니’ 정심화 여사

지난 7일 열린 정심화여사 17주기 추모식.
지난 7일 열린 정심화여사 17주기 추모식.
지난 7일, 대전시 동구 추동의 한 묘소에서는 조촐한 추모행사가 열렸다. 고(故) 정심화 여사의 17주기 추모식 및 추모비 제막식. 특히 이날은 정심화 여사가 눈을 감은 지 17년 만에 추모비가 세워지는 뜻 깊은 날이기도 했다.

추모사 낭독은 송용호 충남대학교 총장이 맡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는 당신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번 가슴에 고이 간직하면서, 진실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정심화 여사는 ‘김밥할머니’의 원조다.

김밥할머니는 한 때 정심화 여사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였지만, 이제는 평생 어렵게 번 돈을 사회에 기증하는 미담의 주인공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대전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한 아름다운 사연의 할머니에게, 지역민들이 붙여주었던 ‘별칭’이 지금은 정심화 여사와 같은 전국의 또 다른 할머니들에게 붙여주는 ‘예명’이 된 것이다.

정심화 여사는 1914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태어났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남편과 외아들을 두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정심화 여사는 39세의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가 된다. 졸지에 가장이 된 정심화 여사는 그 후 30년 동안 여관을 운영하고 행상을 하며 재산을 모았다. 운동회나 행사가 열리는 곳을 찾아가 김밥과 음료수를 팔기도 했다.

외아들인 임채훈(63·약사)씨는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가 열리면 김밥을 머리에 이고 와 팔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며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김밥할머니’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정심화 여사와 충남대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0년. 당시 충남대 오덕균 총장과 안병기 기획실장에게 ‘어느 할머니가 부동산으로 장학기금을 기증하려고 하는데 받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기증 의사를 밝힌 부동산은 당시 시가로 50억원에 달했다. 당시로서는 개인이, 거액의 부동산을, 그것도 지방대에 기증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대전일보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김밥할머니의 거액 기부’ 소식은 그 해 2학기 내내 대학가와 지역사회는 물론 전국을 뜨겁게 달궜다. 이듬해인 1991년 1월 서울에서 열린 정심화장학재단 창립총회는 문교부에서 직접 관여할 정도였으며 정부는 정심화 여사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

정심화장학재단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232명에게 4억77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또 정심화 여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2년 8월 정심화국제문화회관 기공식도 가졌다. 2000년 완공된 정심화국제문화회관은 한때 국고 지원을 받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도 ‘기부문화 상징’이자 대전시민들의 대표적인 자랑거리로 꼽히고 있다.

정심화 여사의 추모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졌다.

“마침내 여사는 온갖 역경과 고난 속에서 모은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음으로써, 맑고 깨끗한 사랑의 빛과 정신을 우리들 가슴마다 새기고 떠나셨다.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귀감으로 삼고자 돌에 새기니, 그 고결한 정심(正心)이 가슴으로 옮겨져 앞길 비추는 환한 등불이 되어 주길 바란다.”

정심화 여사는 기공식 직후인 1992년 8월 7일 충남대병원에서 향년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우리 곁을 떠났지만 평생 어렵게 모은 재산을 아무 조건없이 사회에 기부하는 제2, 제3의 ‘김밥할머니’는 매년 다시 태어나고 있다. 추모비의 글귀처럼 정심화 여사의 정심(正心)은 지금도 사회를 환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김형석 기자 blade31@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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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있는 정심화 여사.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있는 정심화 여사.
정심화장학재단 창립총회 당시의 정심화 여사.
정심화장학재단 창립총회 당시의 정심화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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