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타파 충청 역할 강조… 그분 서거는 새 민주화 첫걸음”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한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가 대전시 동구 주산동 소재 송좌빈 옹의 자택을 방문, 송 옹 부부와 민주화 동지들의 영접을 받고 있다.<대전일보 DB>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한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가 대전시 동구 주산동 소재 송좌빈 옹의 자택을 방문, 송 옹 부부와 민주화 동지들의 영접을 받고 있다.<대전일보 DB>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

충청지역 민주화의 대부이자, 영원한 DJ맨임을 자랑하는 죽천(竹泉) 송좌빈(85) 옹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북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송 옹을 대신해 차남인 송용길(53)씨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도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뵙기를 바라셨는데 끝내 이렇게 가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조선 기호학파의 거두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12대 손인 송좌빈 옹. 그와 DJ와의 인연은 4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67년 7월 신민당 시절 DJ는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나서며 전국 시국 강연의 첫 기착지로 대전을 선택한다.

당시 항일 투쟁 인사가 주도한 당내 구파 계열이었던 송 옹은 신파의 DJ가 마뜩지 않았다. 하지만 버스도 들어오지 않은 지금의 대전시 동구 주산동 본가에 인편을 통해 참석을 요청했던 DJ의 배려에 한 강연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잠깐 자리에만 참석하고 돌아오기로 했던 당초의 마음은 DJ의 강연에 몰입하게 되고, 2시간 강연 내내 단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게 했다.

“얼마나 대단했는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고, 왜 3선 개헌에 반대해야 하는지 당위성 등을 설명하는데, ‘난다, 긴다’하는 당대 정객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송 옹은 충청 지역에서 3선 개헌 반대를 이끌며, DJ와의 인연을 맺기 시작하게 되고, 42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송 옹과 DJ는 이념적 동지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발전하게 된다. 78년 옥살이도, 3차례의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도 모두 DJ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년배 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깍듯하게 ‘선생’으로 호칭하며 DJ에 대한 존경심을 표출하는 송 옹.

송 옹은 DJ와 충청지역을 이렇게 술회한다.

“선생은 충청의 인재를 무척이나 아끼셨습니다. 틈 날 때마다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를 타파할 수밖에 없는 지역은 충청지역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송 옹은 이같은 DJ의 마음을 헤아려 충청권 인재 발굴에 나서게 되고, 민정당 청년국장이었던 김원웅 전 국회의원을 공천 추천하는 등 인재 영입엔 정파와 계파를 초월했다.

“지난 85년 서슬 퍼런 5공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돌아와 가택연금을 당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산동 우리 집에 방문했습니다. 권노갑, 한화합, 김장곤 등 민주화 동지 200여명이 참석해 전국 동지 대회나 다름없었습니다. 경찰 수 백여명이 삼엄하게 경계하는 가운데 사가에서 동지 대회를 연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DJ가 송 옹을 생각했고, 충청지역을 사랑했던 마음이었다는 것.

송 옹은 “정치적인 면에서 현재 일어날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거 그만한 사람들이 민주화를 위해 뭉쳤듯, 앞으로도 다시 뭉칠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서거 자체가 아닌 새로운 민주화를 위한 첫 발걸음일 것입니다”며 향후 정국을 예상했다.

우세영 기자 sy6262@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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