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과학·청정도시로 괄목상대…진화는 계속된다

1960년대 유성장날 모습(위). 5일장이 선 최근 유성장.
1960년대 유성장날 모습(위). 5일장이 선 최근 유성장.
대전을 비롯해 부산, 대구, 인천, 광주, 울산 등 6대 광역시의 공통점 중 하나는 산하 자치구 이름 가운데 동구, 서구, 중구 하는 식으로 네 개의 방위를 뜻하는 동서남북과 가운데 중(中)자를 구(區)이름으로 쓴 경우가 세 개 이상 된다는 것이다. 직할시 또는 광역시로 출범할 당시 구 획정을 할 때 해당 구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고유 지명이 없어 이 같은 방위, 위치를 가리키는 용어를 구 이름으로 붙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최근 두 개의 구를 거느리게 된 천안시도 서북구, 동남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이 같은 측면에서 고심 끝에 나온 지명이 아닐까 생각된다. 천안에서는 서북구, 동남구라는 구 이름이 천안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어설프고 안이한 구 이름 붙이기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지만 일단 정해진 구 이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무튼 넓지 않은 도시가 상주인구 100만이 넘어 직할시 또는 광역시로 출범하게 되자 주로 공무원들이 붙인 이 같은 구 이름에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측면도 있었을 듯싶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볼 때 대전의 경우 유성구, 대덕구 등 고유 지명이 구 명칭에 관철된 케이스를 보면 그 이름이 전국적인 보편성과 특수성이 인정됐기에 구 이름으로 정착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성구의 경우 이 같은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대전시 유성구에 따르면 대전이 보통시이던 1983년 유성출장소가 문을 열자 유성 주민들은 유성출장소의 유성구 승격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1987년 말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는 대전에 유세를 와 유성(儒城)의 구 승격을 공약했다. 유성 주민들은 유성의 구 승격을 확신하게 됐다. 1988년 1월 대전 중구의 일부를 분할해 서구가 출범했으나 유성의 구 승격은 제외됐다. 신탄진읍은 구로 승격되지만 유성은 끝내 제외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당시 이춘구 내무부장관이 “유성은 인구가 적어 구 승격이 안 된다”고 발언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유성 주민의 배신감과 분노는 커지기 시작했다. 대전시는 유성구 설치를 바랐지만 충남도는 상대적으로 냉담한 태도였다. 유성구청승격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궐기대회와 서명운동이 연일 벌어졌다. 각계 요로에 진정서와 청원서 제출도 잇따랐다. 당시 야당인 평민당이 이에 앞장섰고 결국 1988년 12월 정기국회에서 여소야대 정국 구도를 이용해 유성구 승격 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성출장소 관할면적은 당시 대전시 전체면적 208㎢의 44%에 달하는 92㎢였다. 행정동은 5개 동이었고 법정동은 31개 동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 인구는 1만2000여 가구에 5만6321명에 불과했다. 면적이나 법정동 수로는 구 승격에 문제가 없었으나 인구가 문제였다. 인구가 모자라자 주민등록이 된 인구는 아니어도 상주인구가 8만이 넘는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숙이나 자취하는 충남대학교 학생들을 포함하면 이 같은 숫자가 나온다는 것. 유성구청승격추진위원회는 유성 인근지역을 포함하는 안을 내놓았다. 유성 5만6321명을 비롯해 구즉면 6738명 탄동면 2824명 진잠면 3750명을 포함하고 기성면과 가수원동 인구를 합하면 총 10만233명에 이른다는 안이었다. 1989년 1월 1일 유성구가 출범할 때 유성구 획정에 이 안이 상당부분 반영됐다.

유성출장소 초대 총무과장을 지낸 박용진 씨는 “1983년 유성출장소 출범 당시 각 동(洞)의 명칭을 정할 때 유성1, 2동으로 하자는 안이 나왔는데, 유성이라는 이름은 더 크게 써먹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져 온천1, 2동으로 정했다”면서 “당시 이미 유성의 구 승격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민경용 전 유성문화원장은 “유성 사람들은 유성이라는 이름에 커다란 애착과 자긍심을 갖고 있었기에 이 이름을 지키자는 큰 뜻을 갖고 있었다”며 “구 승격도 이름을 지키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대전시정 자문위원을 지낸 한 인사는 “나중에 각 구의 명칭을 정할 때 방위를 기준으로 하자는 안이 제기됐는데 이를 적극 반대했다”면서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유성의 이름을 지켜냈다”며 유성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염원을 회고했다.

그렇다면 유성이라는 지명은 언제 어떻게 정착됐을까. 대전유성문화원에 따르면 ▲백제가 망한 뒤인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유성산성 서쪽과 지금의 유성구 상대동 일대를 부르던 지명인 노사지현(奴斯只縣)을 유성현(儒城縣)으로 고쳐 부르되 유성현은 이 일대 6성(城)의 안쪽에 있다고 해서 육성(六城)으로 부르다 이름이 변해 유성이 되었다는 설 ▲유학(儒學)에서는 백성들을 사민(斯民)이라고도 부르는데, 큰 장터가 있어 사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고 해 유성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는 것. 유성문화원은 유성이라는 지명 유래로 전자일 것으로 보고 있다. 유학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됐다고만 보기에는 조선시대 중기 사게 김장생 선생이 성리학 강론을 폈다는 현 유성구 성북동이나 여흥 민씨 집성촌인 유성구 도룡동, 충주 박씨들이 모여 살았던 유성구 문지동이 더 유학의 기운이 컸다는 것이다.

유성은 근대에 와서도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1894년 봉기한 동학군이 진격할 때와 퇴각할 때 유성을 거쳐 갔으며 문지동에서 관군에게 크게 패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또 구한말 현 유성구 장대동에서 의병이 봉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0년대 일본인들이 온천공을 개발했고 1932년 유명한 공주갑부 김갑순(金甲淳)이 온천장을 신설한 곳도 유성이었다. 현재의 리베라 호텔 자리에 1958년 만년장이 문을 열었고 1966년 유성관광호텔이 영업을 시작하면서 온천으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973년 대덕연구단지가 정착하고 최근 노은 신도시, 도안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크게 변하고 있는 곳이 유성이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보면서 앞으로도 유성의 발전과 변화가 매우 빠를 것이라고 짐작케 한다.

류용규 기자 realist@daejonilbo.com

사진 신호철 기자 canon@daejonilbo.com

자료사진=대전일보 DB·대전유성문화원·오진수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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