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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재발견 - (23) 유성온천

2009-07-15기사 편집 2009-07-14 06:00:00

대전일보 > 사회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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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엄마·아빠 손잡고 떠났던 ‘목욕탕 나들이’

첨부사진1지난 5월에 열렸던 눈꽃축제 족욕체험 모습. 1984년 개발되기 전 유성시가 전경. 1990년대 관광특구로 지정된 유성온천엔 유흥업소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사진 위부터).

보리를 비롯한 잡곡과 밀가루 음식 등으로 하루 세 끼를 해결해가기 시작하던 시절, 초등학교 등 각급 학교에서는 학생들 학력증진과 함께 ‘위생’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을 짧게 깎으라는 주문은 보통이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목욕’을 하라는 선생님들의 주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욕실은 물론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집을 찾아보기가 바닷가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때였다. 간혹 일본식 적산가옥 중 일본식 욕조를 갖춘 집이 있기는 했지만 충남도청 뒤 동네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흑백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인기 오락프로그램이었던 ‘유쾌한 청백전’에서 출연기회가 별로 없었던 일반서민들이 출연하자 사회자가 했던 질문 중 하나는 “목욕을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였다. 출연자들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일주일에 한번씩 하고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욕실이 딸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던 이때에 ‘일주일에 한번 목욕한다’는 정답(?)이었다. 방송에서 목욕횟수를 질문하는 것은 요즘 시각으로 보면 의아한 일이지만 ‘반공방첩’과 함께 위생이 강조되던 시대상의 한 단면 중 하나였다.

먹고 살기가 여전히 고달팠던 시대이기는 했지만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는 때가 되자 ‘일주일에 한번 목욕’을 모든 가정이 반드시 지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들도 자녀들의 위생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위생 자체에 대한 관념이 생겨난 것도 이유이지만 이른바 체면의식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자식을 씻기지도 않고 밖으로 내보내느냐는 시선을 의식하는 관념이 작용한 듯싶다.

어찌됐든, 동네마다 크고 작은 대중목욕탕이 성업 중이었는데 목욕요금을 아끼려는 대다수의 부모들은 집에서 물을 데워 부엌 또는 안방에서 어린 자녀들을 씻겼다. 주택가 골목에서 “목욕 안 하겠다”며 울며 떼쓰는 어린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때였다. 어린이들이 목욕 안 하겠다며 떼쓰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때를 벗기기 위해 피부를 사정없이 문지르는 ‘이태리타올’이 주는 통증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또 동네목욕탕 앞에서 어린 아들 손목 잡고 온 어머니가 “얘는 여섯 살”이라고 우기는 장면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대부분의 목욕탕들이 여탕에 남자어린이들이 들어갈 수 없는 연령기준을 일곱 살로 잡았기 때문이다.

좀 더 사정이 나은 집들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가족 전체 또는 일부가 충남 대덕군 유성읍 유성온천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목욕 나들이’를 갔다. 대전 시내버스 요금이 1인당 15원 하던 시절 시내(市內)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25원을 받던 시내버스를 타고 목욕하러 대전시와 대덕군 유성읍의 경계인 만년교를 버스를 탄 채 건너 유성온천으로 가는 것이다. 주말과 휴일이면 수건과 이태리타올, 비누, 샴푸 등을 담은 플라스틱 바구니나 비닐봉투를 든 목욕객들을 유성 가는 시내버스 안 또는 유성읍내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유성온천은 대전 시내와는 영 딴판인 분위기를 보인, 관광지다운 고장이었다. 대전 도심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집들도 거의 없는데다 주변은 논밭이 펼쳐져 있어 목가적인 전원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대전 시내와는 달리 큰 호텔들도 즐비했다. 목욕탕의 규모도 대전 시내 동네 목욕탕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크고 넓었다. 어린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닦고 나와 주변 식당에서 국수나 설렁탕 등을 사먹고 시원한 맥주, 음료수를 마시는 것도 온천에서 나른한 휴일 오후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시민들의 소득이 점차 늘어나고 1980년대 중후반부터 ‘마이카’ 붐이 불면서 유성온천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유성의 목욕탕업계는 주말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적지 않은 손님들이 들어왔다. 대전시유성구에 따르면 1990년 15개이던 유성의 목욕탕은 1997년 22개로까지 늘었다. 그러나 유성온천에 이때부터 그늘도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1990년대 유성온천이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유흥업소 영업시간 제한이 없어지자, 각종 유흥업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전 시내를 비롯해 일반 도시들은 밤 12시까지만 영업할 수 있는 영업시간 제한이 적용되자 당연한 ‘풍선효과’였지만 이는 동시에 유성에 서서히 드리워지는 그늘이기도 했다. 온천 이미지는 희미해지고 유흥 이미지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온천 하면 유성온천, 동래온천, 온양온천 정도만 알던 국민들에게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온천이 개발되기 시작해 수많은 온천이 홍보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유성온천에 수많은 경쟁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1인당 국민소득이 늘어나면서 국민들이 즐기는 레저와 휴양 방법이 다양화한 것도 유성온천에게는 타격이 됐다.

백제시대 때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온 유성온천. 신라군 화살을 맞고 포로가 됐다가 도망쳐온 백제군 병사가 온천욕을 하고 난 뒤 온몸의 깊은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고, 조선 태종이 왕자이던 1393년 이곳에서 목욕을 한 뒤 군사훈련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3년 일본인들이 들어와 욕조 4개와 특등욕장 2동을 지어 근대적인 온천시설을 준공시킨 것을 계기로 오늘날의 유성온천으로 발전해왔다.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치하던 시기 이곳만의 일화를 갖고 있는 유성온천은 그러나 전국의 다른 온천처럼 깊고 긴 침체기를 보내고 있다.

유성온천이 회생하기 위해서는 그 길이 간단치 않아 보인다. 전문가들이 내놓는 대안도 여러 갈래이다. 보양온천, 온천병원 등 특화온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온천을 즐기고 기쁨을 나누던 모습을 하루빨리 되찾기를 기대한다.

글 류용규 기자 realist@daejonilbo.com 사진 신호철 기자 canon@daejonilbo.com

<자료사진=대전일보 DB·대전유성문화원·오진수 사진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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