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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재발견-(17) 둔산 신도시②

2009-06-03 12면기사 편집 200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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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몰아친 ‘개발열기’…대전생활권 확 바꿨다

2000년초 남선공원을 중심으로 촬영한 항공사진(사진 위). 1989년 신도시 조성공사가 한창인 둔산 전경. 공사현장 바로 아래 도로가 계룡로이고 사진 오른쪽 숲이 남선공원, 그 옆 하천은 유등천이다.
공군교육사령부와 향토사단인 육군 제32사단·육군통신학교 등의 군부대 외에는 논밭 일색이었던 현재의 둔산동·월평동·만년동 일대 743만4838㎡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포함해 총 5만700호의 각종 주택을 짓는다는 대전 둔산 신도시 개발계획은 처음부터 대전 시민들의 관심과 인기를 모은 것은 아니었다.

둔산 개발 주체인 한국토지공사로부터 공동주택용지를 구입한 대형 건설회사들은 1980년대 후반 막바지부터 분양에 나섰지만 대체로 냉담한 대전 시민들의 반응에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대전시청을 비롯한 행정기관·정부투자기관 등 각종 공공기관 대부분이 대거 둔산 신도시로 이전하겠다며 토지공사에게 경쟁적으로 용지공급을 신청하는 러시 현상이 일어나고, 서울과 경기도 정부과천청사에 있던 정부 중앙부처 가운데 상당수 부처가 둔산으로 옮겨올 것이라는 당시로서는 다소 신빙성 있어 보이는 관측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대전 시민들 사이에 둔산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이즈음 대전을 방문한 노태우 당시 대통령도 “정부 부처 가운데 상당수를 대전 둔산 신도시로 옮기겠다”고 밝혀, 시민들의 둔산에 대한 관심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당시 언론에 보도되던 대로 대전이 ‘제2의 행정수도’가 되거나 말 그대로 ‘국토의 중핵도시’가 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가 현실화되는 듯했다.

이에 따라 둔산 신도시는 ‘대전의 8학군’, ‘이상향 같은 신도시’로 불리면서 대전 시민들은 물론 일부 수도권 주민들 사이에서도 이른바 ‘둔산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1989-1990년 주택청약저축과 주택청약예금 상품을 팔던 당시 한국주택은행의 각 지점 창구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시민 두서너 명만 모이면 단연 화젯거리는 둔산이었다. 서울 강남 사람들도 둔산 아파트를 산다더라, 서울 사람들이 몰려와 둔산에 빌딩을 지으려고 대거 땅을 산다, 등등 사실인지 루머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말들이 대전 시내에 나돌았다. 이 정도 상황이 되자 상당수 시민들에게는 둔산에 들어가 살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 취급을 받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공연한 불안감이 생길 정도였다. 이제 시민들에게 둔산은 ‘꿈의 도시’로 비쳐지는 듯했다.

당시 대전시의 행정도 둔산에 대한 이 같은 이상 현상에 대해 결과적으로 일조했다. 대전시 고위관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둔산 신도시의 성공적인 조성에 대해 온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대전 역사상 처음 만들어지는 신도시이다 보니 행정공무원으로서의 책임감과 열정을 드러내는 발언이었지만, 이 같은 태도가 결과적으로 항상 긍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전시는 사안에 따라 오락가락 하기도 했다. 대전시는 1990년 5월 13일 “둔산에 경부고속철도 역을 유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경부고속철도 노선계획이 확정되기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당시 철도청은 대전시의 이 같은 계획에 극력 반발했다. 앞서 대전역에 민자역사를 유치하고 그 지하에 고속철도역을 설치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는 철도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계획이었다. 대전시는 둔산 고속철도역 구상이 무산될 것으로 관측되자 이번에는 엉뚱하게 대전 서남부지구에 고속철도역이 지나가도록 하겠다고 계획을 수정해 발표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코미디 같은 현상이었지만 행정기관들도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둔산에 대한 이상 열풍에 의도하지 않은 불을 놓은 셈이다.

둔산에 대한 과열 현상이 일어나자, 불도저와 굴삭기 등이 밀어버린 둔산 신도시 공사현장을 비롯해 대전 시내 곳곳에 생긴 모델하우스에는 연일 많은 인파가 몰렸다. 사람들이 연일 모델하우스로 몰리자 사기분양 사건도 잇따랐다. 당시 모델하우스에서는 아파트 청약도 함께 받는 바람에 현금과 수표 뭉치가 넘쳐날 정도였다. 사기꾼들은 분양사무실 바로 옆 또는 위층에 위장 사무실을 차려놓고, 아파트를 분양받으려고 피땀 흘려 모은 돈을 챙겨 달아나는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지만, 금융 및 아파트 청약에 있어 상대적으로 시스템이 허술했던 18-19년 전의 현상이었다. 게다가 둔산 이주권을 불법으로 전매하는 속칭 ‘딱지 전매’ 사건은 더욱 흔해 거의 끊임없이 발생했을 정도였다. 당시 둔산 신도시를 관할했던 대전서부경찰서에는 매달 평균 6-7건의 둔산 아파트 사기사건이 접수됐다.

아파트를 ‘성냥갑’, ‘닭장 같은 집’으로 보던 중년층의 고정관념이 바뀐 것도 ‘둔산 바람’에 일조했다. 당시 대전에서 아파트를 선호했던 중산층과 재력가들이 살던 곳은 중구 오류동 삼성아파트와 태평동 삼부아파트였다. 이곳에 거주하던 중산층들은 아파트가 주는 생활의 편리성과 한국에서 아파트가 갖는 재산가치에 대해 대전에서는 비교적 일찍 눈을 뜬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살던 아파트를 팔거나 보유한 채 둔산으로 이주하는 러시현상을 보이자 단독주택을 고집하던 사람들도 이들의 대열을 뒤따라갔다. 둔산 열풍의 한 단면이었던 셈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둔산 신도시 1지구 아파트 입주는 1992년과 1993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둔산 1지구는 지금의 둔산1, 2동과 최근 둔산3동으로 이름을 바꾼 삼천동, 탄방동 일대이다. 아파트 입주가 러시를 이뤘지만 주변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는가 하면 한동안 병원, 학교, 각종 상가 등 생활지원·편의시설이 기대에 못 미쳐 주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게다가 행정기관 이전은 아파트 입주보다 훨씬 뒤처졌다. 당시 둔산 신도시에서 업무를 보는 행정기관은 둔산동사무소와 1993년 8월4일 이전을 완료한 대전시교육청뿐이었다. 이때 대전시교육청 주변 중앙 행정업무지구는 황량한 벌판에 각종 기반공사 및 빌딩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흙먼지 날리지 않는 날이 많지 않았던 데다, 6층 높이인 시교육청 건물이 홀로 우뚝 서 있는 바람에 굉장히 큰 건물로 보일 정도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둔산 신도시 2지구, 즉 둔산동 일부 지역과 월평동 일대는 이 시기 여전히 아파트단지 공사가, 만년동 일대는 ‘대전엑스포93’에 대비한 남문 및 광장 공사 등 각종 공사가 진행되는 바람에 둔산의 절반은 항상 흙먼지가 날리는, ‘공사 중’이었다. 2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게 될 신도시를 만드는 공사가 일사분란한 계획에 따라 빈틈없이 진행됐더라면 시민들의 불편이 그만큼 덜어졌겠지만 모든 일이 그렇지 않듯 둔산 신도시 공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16-20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 같은 흔적은 찾기 힘들지만, 사실은 둔산의 일부는 지금도 ‘공사 중’ 아닌가. 둔산은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글 류용규·사진 빈운용 기자 realist@daejonilbo.com

<자료사진=대전일보 DB·대전시서구·오진수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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