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울려퍼진 ‘윙∼’ 소리의 추억 그리고…비행기는 떠났다! 사람들이 모였다!

(사진 위부터) 1980년대 공군기교단 활주로, 1980년대 공군기교단 주변 모습, 현재 시청사 주변, 현재 둔산지역 전경
(사진 위부터) 1980년대 공군기교단 활주로, 1980년대 공군기교단 주변 모습, 현재 시청사 주변, 현재 둔산지역 전경
1980년대 말까지 대전 유성지역에 살던 주민들과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 충남대학교 등에 다니던 대학생들은 다소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일상생활을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라서 익숙해지는 바람에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살았겠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일이란 매일 ‘윙-’ 소리 일색인,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소음을 들으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지역 상공에서는 주말을 제외한 평일 경비행기가 적으면 한 대, 많으면 서너 대까지 날아다녔다.

그 경비행기들이 떠오른 곳은 현재 둔산 신도시에 있던 공군교육사령부 활주로. 당시 공군 조종사들의 초등 비행훈련이 대전 공군교육사령부에서 미제 L-9 연락기를 이용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초등 비행훈련을 위해 이륙한 이들 경비행기들은 대전 시민들의 민원 또는 만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고를 의식해서인지 당시 인구가 밀집해 살던 대전 원도심 상공으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즉 현재의 대전 서구 둔산 신도시와 유성지역 일대 또는 충남 공주 쪽 상공에서만 비행훈련을 했던 것이다. 대전에서는 민간여객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이 없어 시민들은 비행기를 타볼 기회가 없음에도 매일 낮게 떠다니는 비행기 소음을 듣고 산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환경이자 경험이었다.

현재 30여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밀집해 사는 둔산 신도시는 과거에 군부대가 모여 있던 ‘군사타운’이었다.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군부대는 역시 공군교육사령부. 현재 국민연금관리공단 대전충남지역본부 소재지 인근에 정문이 있던 공군교육사령부는 약 900m 길이의 활주로를 가진 공군 장병 특기교육을 시키는 곳이었다. 현재 서구 탄방동 산호아파트와 개나리아파트가 있는 곳에서 시작됐던 활주로는 길이가 짧아 대형 비행기나 제트엔진을 가진 최신 전투폭격기는 이착륙할 수 없었지만 현재 서구 탄방동 세등선원이 있는 구릉 위로 훈련용 공군 L-9 또는 수송기가 이륙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또 특정 훈련이 끝나거나 임관식이 있던 날 부대 정문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수백 명의 공군 장·사병들도 인상적인 장면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현재 은하수아파트가 있던 곳에는 부대 안 연못이 자리해 있었고, 녹원아파트 자리에는 공군사병들이 생활하는 막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공군교육사령부, 즉 대전비행장은 일제 말기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대전 시내 중학생과 공주지역 중학생, 근로자들을 강제로 동원해 조성됐다고 한다. 이 비행장은 해방 후 육군이 관리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기지로 활용됐으며 미육군 제24사단이 대전 방어에 실패하게 되자 미군이 철수하면서 이곳에 쌓여 있던 군수물자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밤에는 그 불꽃이 사방 수십㎞ 밖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역시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공군이 대전비행장에 공군항공병학교를 설립했고 1956년 공군기술교육단이 경남 창원에서 대전비행장으로 이전해 오면서 공군 예하 각종 교육부대들이 편입됐다. 때문에 대전에서 비교적 오래 살아온 시민들은 이 부대를 ‘공군기교단’으로 부르곤 했다. 이후 1973년 4월 공군교육사령부로 부대가 개편됐다. 공군교육사령부는 이후에도 15년 넘게 이곳에 주둔하다 둔산 신도시 개발이 결정되면서 1988년 10월 경남으로 이전했다.

둔산 신도시에 주둔해 있던 부대는 또 있었다. 향토사단인 육군 제32사단 사령부가 현재 갤러리아 타임월드 백화점 및 인근 국민생활관 자리 등지에 주둔해 있었다. 이곳은 예전 육군이 관구 편제를 유지하던 시절 제3관구 사령부로 불리기도 했다. 당연히 헌병대 등 사단 직할부대들도 주변에 모여 있었다. 아무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육군부대와 공군부대가 이웃으로 있던, 보기 드문 지역이기도 했다. 육군 32사단 사령부 역시 둔산 신도시 개발이 결정되면서 충남 연기군으로 옮겨갔다. 공군교육사령부 정문에서 유성 가는 길인 현재의 계룡로를 건너 맞은편인 현재 서구 갈마동 경성큰마을 아파트 자리에는 육군통신학교가 있었다. 통신 주특기를 가진 장교와 사병들에게 통신병과의 각종 주특기교육을 했으며 간혹 해군, 해병대 장병들의 통신 주특기교육을 위탁받아 시행하곤 했다.

이렇듯 큰 군부대만 세 개나 주둔(駐屯)하던, 작은 군사도시였던 둔산(屯山) 신도시는 이름 자체가 갖는 예언적 지명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대전서구문화원에 따르면 둔산동은 과거 둔지미(屯之尾)라고 표기했는데, 대둔산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명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다른 향토사학자들은 삼국시대 대전과 둔산이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던 이른바 최전방 지역이었으므로 전쟁을 대비한 군사들이 주둔해 있던 곳이어서 이 같은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명도 하고 있다. 아무튼 작지 않은 군부대가 밀집해 주둔해 있던 것은 지명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둔산지역에는 1980년대 말 큰 변화를 맞이할 결정이 내려진다. 1985년 4월 정부는 현재의 대전 서구 둔산·월평·갈마·삼천·탄방·괴정동 일원을 택지개발 예정지로 묶은데 이어 1988년 3월 도시 및 주거생활 공간개발까지 이 계획에 포함시킨다. 이 계획은 이후 정부행정기능 일부 분담을 수행하는 신시기자 개발 행정·상업 업무 등을 위한 도심기능까지 추가되며 중부 광역권의 중심지인 대전시 도시개발 및 주거환경 제고라는 목표까지 더해진다. 이후 1988년 취임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주택 200만호 건설공약 이행을 위한 대상지에 둔산 신도시가 포함된다. 당시 이 공약에 포함된 전국의 신도시는 대전 둔산 외에도 경기도 성남시의 분당, 경기도 고양시의 일산, 부산 해운대, 대구 수성 신도시 등이다.

이에 따라 대전 둔산 신도시는 743만4838㎢에 총 5만700호의 각종 주택을 세워 20만2800명을 수용하는 것을 목표로 대규모 공사가 진행됐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매일 보는 둔산 신도시이다. 대전시청을 비롯해 법원, 검찰청, 체신청 등 수많은 관공서와 기업·금융기관·병원·각급 학교 등이 둔산으로 이전해 주거와 직장·경제활동이 한 곳에서 이뤄지는 신도시가 됐다. 정주 여건이 전국 10위 안에 드는, 생활에 만족할 만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둔산 신도시 생활에서는 개선돼야 할 게 아직도 적지 않다. 전국 최고수준의 신도시로 될 때까지 불편한 점들을 개선해 나가는 노력이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글 류용규·사진 빈운용 기자> <자료사진=대전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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