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 함께한 ´스포츠 축제의 장’

(사진 위부터)리모델링 공사 완료 후 한밭종합운동장 조감도. 최근 보문산에서 바라본 한밭종합운동장 전경. 제 90회 전국체전을 앞두고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주경기장 본부석. 1994년 제75회 전국체전 개회식 카드섹션 및 마스게임 리허설 장면.
(사진 위부터)리모델링 공사 완료 후 한밭종합운동장 조감도. 최근 보문산에서 바라본 한밭종합운동장 전경. 제 90회 전국체전을 앞두고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주경기장 본부석. 1994년 제75회 전국체전 개회식 카드섹션 및 마스게임 리허설 장면.
대전 중구 부사동 162-1번지 한밭종합운동장. 대전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면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한밭종합운동장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꼭 보고 싶은 스포츠 경기가 있어서이든, 좋아하는 스타플레이어를 보기 위해서이든, 학창시절 가고 싶지 않은데도 동원관중으로 불려간 경우이든….

하늘에서 보면 넓은 배처럼 보이는 종합경기장을 비롯해 야구장, 충무체육관, 실내수영장, 테니스코트 등을 갖추고 있는 스포츠 종합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 한밭종합운동장은 대전 스포츠의 요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치르면서 세워진 대전 월드컵경기장을 비롯해 대전지역 곳곳에 스포츠 시설이 들어섰지만 1964년 1월 개장한 한밭종합운동장은 예나 지금이나 대전 스포츠의 중심이다. 45년의 연륜이 쌓인 종합경기장과 그 주변은 오는 10월20일 열릴 예정인 제90회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를 대비해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어서 어수선한 공사장 분위기이지만 야구장에서는 한화이글스의 대전 홈경기가 열리면 어김없이 수많은 관중이 운집하고 충무체육관에서는 각종 스포츠 경기 및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6.25 전쟁의 상흔이 거의 아물어갈 무렵인 1958년 발족한 사단법인 대전공설운동장 설치위원회가 도민들에게서 모은 성금을 더해 1959년 기공된 뒤 5년 가까운 공사 끝에 1964년 1월 문을 연 한밭종합운동장의 처음 이름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용됐던 대전공설운동장이다. 인근 주민들의 공동묘지와 논밭 일색이었던 이곳에 세워진 공설운동장과 야구장, 배구장 등은 처음에는 관중석이 토담으로 만들어지는 등 요즘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시설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단계적으로 예산이 투입돼 콘크리트로 된 스탠드 등이 설치됐지만 경기장 시설이 빈약한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런 형편이었지만 당시 대전에서는 가장 크고 형태를 제대로 갖춘 스타디움이어서 전국체육대회를 비롯해 규모 있는 스포츠 경기, 대규모 집회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고 했던 이른바 1.21사태 직후인 1968년 4월1일 개최된 향토예비군 창설대회도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이어 1970년 12월 59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충무체육관이 완공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호에서 이름을 따온 충무체육관은 대전 최초의 실내체육관으로 농구 배구 핸드볼 배드민턴 등 각종 실내 스포츠 경기와 실내 집회가 단골로 열린 장소. 한밭종합운동장은 그 뒤 1979년에 열린 제60회 전국체육대회를 대비해 주경기장과 야구장이 증설됐고 실내수영장 등이 신축됐다. 1994년 8월 실내수영장을 다목적체육관으로 바꾸어 개장했고 두 달 뒤 신축된 실내수영장이 문을 열었다. 2003년 인라인스케이트장이 문을 여는 등 한밭종합운동장은 30여 년간 필요할 때마다 시설 신축, 증설 등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 모습을 갖추게 됐다.

40대 후반 이상 대전 시민들에게 한밭종합운동장, 즉 공설운동장 하면 전국체전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을 듯싶다. 1979년 10월12일 역사상 대전에서 두 번째로 열린 제60회 전국체전 개폐회식에는 당시 대전 시내 주요 고등학교 남녀 학생들이 대거 동원됐다. 매스게임과 카드섹션을 비롯해 개폐회식의 주요 행사에 동원된 고교생들은 상당한 수업결손을 감수해가며 6개월 가까운 사전연습을 해야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할 것이라는 시민들의 기대와 달리 최규하 국무총리가 개막식에 참석한 이 대회에서 충남은 서울, 경기에 이어 종합3위에 입상했다.

이 전국체전에 대비해 1978년 대대적인 증설보수 공사가 진행됐는데, 당시 대전시장을 비롯한 충남도와 대전시 고위관계자들이 전광판 시설공사를 비롯한 주경기장 공사 진척 상태를 둘러보고 5분여 뒤 공설운동장 정문을 빠져나가는 순간 주경기장의 전광판이 스탠드 위로 무너져 내리는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콘크리트로 타설한 기초가 부실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충남도와 대전시는 다시 같은 공법으로 세우면 전국체전 개최시기에 맞추기 어렵다고 보고 전광판 위치를 남쪽 스탠드에서 반대쪽인 북쪽 스탠드로 옮기고, 공기에 맞출 수 있도록 기초를 콘크리트가 아닌 철골조립식으로 결정했다. 한밭종합운동장 전광판이 한낮 햇빛을 오랜 시간 많이 받아 전광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북쪽에 오랜 기간 있었던 이유다. 당시 충남도와 대전시 고위관계자들은 사고경위를 보고 받은 직후 사석에서 “우리의 명(命)이 짧지는 않은가 보다”라고 말하며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전국체전은 이후 대전직할시 시절이던 1994년 제75회 대회가 열렸으며 오는 10월20일 예정된 제90회 대회를 위해 2007년 12월부터 시작된 리모델링 공사가 8월 완공을 목표로 한찬 진행 중이다. 이밖에 매년 5월 열리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의 스포츠 제전인 소년체육대회도 대전에서만 1973년 제2회 대회, 1982년 제11회 대회, 1995년 제24회 대회 등 세 번이나 열렸다.

40대 초반 이하 세대에게는 한밭종합운동장 하면 아무래도 야구, 축구 등의 프로스포츠가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를 것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대전에는 OB베어스가 연고지로 정하고 둥지를 틀었다. 당시 무적의 투수이던 박철순을 비롯한 스타플레이어들의 플레이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한밭야구장으로 몰려들었다. 대전권에서 수많은 팬을 거느렸던 OB베어스는 1985년 돌연 연고지를 서울로 변경한다고 발표하고 그해 3월30일부터 서울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정해 경기를 치렀다. OB베어스는 이후 1999년 1월 두산베어스로 팀 이름을 변경했다.

OB베어스가 대전을 떠난 1985년, 빙그레이글스가 대전을 연고로 하고 프로야구 제7구단으로 창단됐으며 1993년 시즌을 끝낸 뒤인 11월1일 현재의 이름인 한화이글스로 고쳤다. 프로야구 리그에 참가한 첫해인 1986년 7위, 이듬해인 1987년에는 6위에 그쳤지만 1999년에는 출범 14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때의 우승을 기념하는 돌탑이 한밭야구장 바로 옆에 세워져 있다. 한화이글스는 1988년·1989년·1991년에는 2위를 차지하는 등 수차례 플레이오프,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해 대전 팬들을 기쁘게 하기도, 아쉽게 하기도 했다.

1983년 출범한 프로축구리그에 대전 연고팀은 내내 없다가 1997년 시민 성금을 바탕으로 대전시티즌이 탄생했다. 한밭종합운동장 주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정한 대전시티즌은 1991년 FA컵 대회에서 정상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냈는가 하면 2007년 6강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빈약한 자본 탓에 높은 연봉을 줘야 하는 스타급 선수들을 영입할 수 없어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아 대전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대전시티즌은 2002년 월드컵 이듬해인 2003년부터 대전 월드컵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쓰고 있다.

이렇듯 한국 스포츠 역사의 가운데 자리를 지켜온 한밭종합운동장은 정문 자리에 거대한 통유리 정문이 세워지고 주변은 쾌적한 공원 분위기를 갖게 되는 등 현대적인 디자인과 한층 편안하고 다양해진 시설을 갖추고 8월중 재개장할 예정이다. 올해 90회 전국체전을 대전 시민과 국민들이 축제처럼 즐길 요람으로 기능하게 될 한밭종합운동장은 이후에도 오랜 동안 시민들에게 명실상부한 대전 제일의 체육공원으로 자리매김 할 게 틀림없다. <글 류용규·사진 신호철 기자> <자료사진=대전일보 DB사진·대전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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