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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의 시네스토리-메멘토 (2000, 크리스토퍼 놀란)

2009-03-14기사 편집 2009-03-1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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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지…

메멘토 (2000, 크리스토퍼 놀란)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배우 ‘손예진’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내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정말로 좋아했던 남자짝궁이 내게는 관심도 없고 문구용품으로 상상을 뛰어넘는 놀이만 하는 가운데 볼펜안의 심을 잘라내 잉크로 손톱을 까맣게 물들이던 장면이다. 그 이후로도 내 기억은 몇 년씩 사이를 두고 구멍 난 달 표면처럼 듬성듬성 들어차있다.

친한 친구 하나는 지난 기억들을 어찌나 세세하게 구전하는지, 함께 하던 시절의 별 시답잖은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어록까지 머릿속에 담고 있을 정도이다. 정작 본인은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해 괴로울지 모르겠으나,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거름삼아 성장하고 그것을 글에 접합시키는 작가에게 그만큼의 축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남자는 강도에게 아내를 잃은 후 그 충격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그렇다. 영화계에서 툭 치면 튀어나오는 그 뻔한 설정중 하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그가 기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남자는 10분 안에 그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잊어버린다. 그렇기에 남자에게 메모는 삶을 끌어갈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문신을 새기고 그의 속내는 무엇인지 파악해 그때그때 기록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일도 쉽지 않을 것 같은 그는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쫒고 있다. 그리고 위태로운 추적 끝에 누군가를 죽이지만 그는 과연 진범인가.

사실 사람의 기억이란 그것을 머릿속에 저장을 하던 메모지에 기록을 하던 모두 주관적인 감정과 판단이 끼어들기에 불확실하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기억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어쩌면 내 상상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실체 없는 덩어리일지 모른다.

‘메멘토’는 이런 분들께 복용을 권장한다. 함량이 모자란 뇌를 타고난 나는 저주받은 종족이 아닌지, 이런 몹쓸 기억력으로는 딱 하루살이만큼의 삶의 질밖에 보장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가진 분들에게 삼삼한 위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배트맨’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 감독의 역작이며, 머리를 몹시도 쓰게 만드는 놀라운 스릴러다. 영화를 봄과 동시에 평생 잊지 못할 기억 하나를 덤으로 선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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