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정신의 원류… 번영·희망 새 물결 연다

◇금강 다큐 시리즈 목차

1.프롤로그

2.충청인의 삶의 젖줄

①금강의 역사

②금강과 문화

③금강의 자연환경

④금강과 산업

3.금강 살리기 대역사는

4.금강 살리기와 충청 발전전략

5.금강 살리기의 방향과 과제

6.희망과 번영의 물길을 기대하며

◇금강 개관

금강은 한강, 낙동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다. 동으로는 백두대간, 남으로는 호남정맥, 북으로는 한남정맥에 걸쳐 있고 충청도의 기맥(氣脈)인 금남정맥과 금북정맥의 사이를 가로 지르듯 흐른다. 팔공산(섬진강의 발원지)을 마주보고 있는 신무산(897m, 전북 장수군 장수읍)의 ‘뜬봉샘’에서 발원해 진안군에서 구량천과 진안천을 만나 제법 굵어진 강줄기는 정북 방향으로 무주, 영동군을 향해 흐른다. 금산, 옥천 등을 거치며 초강천, 송천천, 보청천 등의 지류를 받아 더욱 도도해진 강줄기는 감입곡류(嵌入曲流, 산지나 구릉지에서 구불구불한 골짜기 안을 따라 흐르는 하천)하며 무주 구천동과 양산팔경(영동) 등의 절경을 빚어내기도 한다. 대전 신탄진에서 갑천과 합류하고 연기군에서 미호천과 합류한 뒤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고마나루의 전설과 낙화암의 한을 품은 채 공주, 부여를 지나며 정안천, 석성천 등의 지류를 다시 받아들인다. 논산 강경에서부 하구까지는 익곡(溺谷, 지반의 침강이나 해면의 상승으로 육지에 바닷물이 침입해 해안에 생긴 골짜기)을 이르며 강경 포구와 군산항의 발달을 촉진한다. 군산만에서 비로소 서해와 만나 395.9㎞의 긴 여정을 마감한다. 금감 유역의 면적은 9810㎢로 상류부에 대전분지와 청주분지, 중류부에 호서평야(湖西平野), 하류부에 전북평야가 넓게 펼쳐져 풍성한 물산(物産)의 보고를 이룬다. 유역의 평균 기온은 11.0-12.5℃, 연간 강수량은 1100-1300mm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역사로 보는 금강

#석기시대부터 삶의 터전

금강 유역은 선사시대부터 최적의 삶의 터전이었다. 금강의 북안에 자리하고 있는 공주시 장기면의 석장리 유적은 구석기 시대부터 금강 유역에서 사람들이 터를 접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 13만년-30만년전의 구석기 시대 문화층이 발견된다. 또 부여 나복리와 서천 장항읍 장암리 등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 유적이 발견된다.

금강은 대동강 유역과 함께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양대 중심지이다.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고 부여 송국리 유적은 남한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최대 유적으로 평가된다. 대전 서구 괴정동의 돌널무덤은 앞으로는 평야가 뒤로는 갑천이 흐르는 금강 유역의 구릉지대에서 청동기시대에도 삶의 터전을 이뤘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고대 역사문화의 원류

금강은 고대문화의 원류이기도 하다. 충남지역에는 15개 정도의 마한 소국이 있었던 추정되는데 상당수가 금강 유역을 근거지로 삼아 번성을 꾀했다.

금강이 역사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계기는 백제 문주왕이 한성을 버리고 웅진(熊津) 천도를 단행하면서부터다. 웅진은 북쪽으로는 금북정맥이 펼쳐지고 남동쪽으로 금남정맥의 줄기인 계룡산이 위치한데다 그 사이로 금강이 북서방향을 가로 막고 흐르는 천연의 요새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뒤 크고 작은 성을 축조해 외침에 대비했고 서해로 이어지는 금강을 대중국 교통로로 활용했다. 금강 중류부의 호서평야와 남쪽으로 펼쳐진 호남평야 등은 경제적 기반이 됐다.

성왕 16년, 보다 강성한 왕국 건설의 웅지를 품고 사비(泗沘)로 천도한 백제는 새로운 중흥기를 구가한다. 사비는 부소산이 솟아 있고 북남서 방향으로 금강이 흐르는 군사적 요충지. 일본과 중국과의 교류에도 유리한 입지를 갖추고 있다. 백제는 사비 천도 이후 국호를 남부여로 구치고 진취성과 개방성을 특징하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금강유역은 삼국시대 주요 접경지의 하나로 치열한 영토쟁탈전의 거점이기도 했다. 청주와 보은, 영동, 장수 등의 금강 유역은 신라와의 충돌과 대립이 잦았던 지역이다. 관산성 전투 등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투가 전개됐다. 이후 금강은 백제 패망의 한을 품은 곳이자 백제 부흥운동의 주요 무대가 된다. 후삼국시대의 금강 유역은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꾀한 주요 세력들의 발상지이자 세력 각축장의 접경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풍요와 번성의 무대

고려시대에더 금강은 주요 역사의 무대였다. 당시 금강 유역은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를 끼고 있어 국가 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고 지방 통제를 위해 12목(牧)이 설치된다. 금강 유역의 공주, 청주는 12목이 설치되고 이후 지방관제가 변경되면서도 금강 유역은 주요 목(牧)의 거점이 돼왔다.

고려는 각 지방의 수로 교통을 이용해 조운제도(漕運制度)를 발전시켰는데 금강 유역에는 전북 옥구군 북안의 금강하구였던 임피의 진성창에 조창이 설치됐다. 고려 후기에는 농민, 천민의 난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금강 유역의 공주 명학소는 망이·망소이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 고려 말기의 금강 유역은 잦은 왜구 침입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조창이 있었던 진성포와 진포(서천) 등은 왜구 약탈이 잦았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들어 금강은 다시 왕도의 대상지로 떠오른다. 비록 천도가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금강 유역의 계룡산 천도내는 조선 수도의 후보지에 올랐고 그 주된 배경은 금강 수로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정비로 8도 체제가 도입되면서 금강 유역의 충청도가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 충청도를 관할하는 감영은 당초 충주에 있었으나 선조 말엽에 공주로 옮기면서 공주 감영을 중심으로 54개의 군현이 배치된다. 조선시대에도 조운제도가 발달했는데 아산의 공세곶창과 덕성창(전북 용안)을 통해 금강유역의 조세가 수납됐다.

조선후기 금강 유역은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농업 생산력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데다 각종 물산이 집결하는 금강 유역의 공주, 강경, 청주 등은 전국적인 상업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장시(場市)가 크게 발달하는데 임천장과 대흥장, 홍산장, 홍주장, 익산장, 한산장, 서천장 등을 통해 내륙의 물산과 해안의 해산물 등이 충청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유통된다. 또 금강 유역의 부여, 정산, 홍산, 임천, 한산, 비인 등 모시가 생상되는 저산팔읍(苧産八邑)에서는 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부보상단이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강경포구는 원격지 교역의 창구이자 상품 유통의 중심지로서 미곡과, 면포, 마포, 어염, 수공업 제품 등이 유입된 뒤 전국 각지로 분배됐다.

#역사와 문화, 관광, 산업이 공존하는 곳

시인 신동엽의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이라는 서사적 함축처럼 금강은 역사적 항쟁의 무대가 된다. 1862년 금강 유역에서는 충청, 전라도를 포함해 18개 군현에서 농민항쟁이 전개됐다. 또 일제 하에서는 금강 유역의 곳곳을 거점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항일 민족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근·현대에 들어 금강은 역사와 문화, 관광 그리고 산업이 공존하는 곳이다.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오랜 역사는 충청정신의 본류를 형성했다. 금강 유역에 광할하게 펼쳐져 있는 역사문화유적은 충청인의 자랑스런 자산이다. 이를 바탕으로 창출되고 있는 관광문화는 지역경제 활성화의 기반이 되고 있다.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통과 첨단의 다양한 산업도 발달해 나가고 있다.

이제 금강은 새로운 역사의 재창조를 꿈꾸고 있다. 천리 물길이 생긴 이래 최대 역사로 기록될 금강 살리기 사업이 시작된다. 금강이 지닌 역사성을 계승하면서도 21세기 충청 번영의 원류로서의 금강의 의미와 시대적 소명을 성찰하는 사회적 방법론이 충청인에게 요구된다. <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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