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비리 농민 실망감 커 농협, 정치 고리 끊어야

무척 춥습니다. 옷깃을 여며 봐도 스미는 찬바람에 움츠러들기만 합니다. 지천명(知天命)에 접어든 농협이 느끼는 12월 한파는 더하겠지요. 구속된 전 수장과 전직 대통령 형님 간의 커넥션 때문에 주위의 눈총이 따갑고 수군거림에 기가 팍 죽었을 테니까요. 모닥불의 곁불도 마음 편하게 못 쬐는 형편일 겁니다.

하지만, 시련은 지금부터입니다. 3대에 걸친 가장(중앙회장)의 연이은 비리연루, 경기침체와 공기업 구조조정 등과 맞물려 큰집(정부)의 단속이 본격 시작될 겁니다. 국민도 조합원도 밖으로부터 시작될 개혁에 암묵적으로 공감하는 처지입니다. 대형 비리사건 때문에 입은 실망이 큰 탓이겠지요. 안팎으로부터 닥칠 뭇매도 있을 테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수모도 감내해야 합니다. 식구(직원)들은 술자리에서 봉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겸허해야 합니다.

잘못의 대가는 치르는 게 순리지만 농협의 수모에 화가 치밀고 굴욕감을 느끼는 것은 농민 조합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촌이 고향인 사람은 농협에 대한 남다른 추억과 향수가 서려 있지요. 금융기관이 다 잘못돼도 농협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농민의 한결같은 마음이지요. 저간의 사정이 어떻든 농민들은 무엇보다 ‘비리농협’으로 낙인이 찍힌 것에 대한 실망감이 큽니다. IMF 외환위기 때 거액의 뭉칫돈이 농협으로 몰렸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농민은 농협에 금융기관 이상의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자식 대학 보내려면 소 팔고 자갈 논 몇 마지기 파는 것은 다반사였지요. 그 시절 농협은 신용이 좀 부족해도 대학생 자식을 담보로 대출을 해줬습니다. 우골탑(牛骨塔)이란 말도 이때쯤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농민의 농협사랑은 더 애틋합니다.

풍년기근(豊年飢饉)이란 말이 있습니다. 농사는 매년 풍년인데 농가 살림은 쪼그라들기만 합니다. 올 농업 총소득은 지난해보다 10.3% 감소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정부 농정 실패의 결실(?)이지요. 지난해 쌀 열 가마 팔아 200만 원 수익을 올렸다면 올해는 180만 원으로 준 것과 마찬가지지요. 앞으로 5년간 계속해서 6-8%씩 농업 총소득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마당에 농협은 수장 잘못 앉힌 죄로 대형수술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왜 배신감인들 없겠습니까.

엊그제 큰집에서 개혁안을 발표했습니다. 가장을 사실상 명예직으로 만들고 중앙조직의 20%를 줄이는 게 골자더군요. 농협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나왔던 재탕, 삼탕 수준 정도지요. 농협을 온통 비리의 온상인 양 몰아붙일 때는 언제고 개혁안은 고작 이 정도인지 용납이 안 됩니다. 이 정도라면 농협에 맡겨도 될 수준입니다. 요란스럽게 소란을 떨 일이 아니지요.

농민은 이참에 완벽한 개혁을 원합니다. 정치논리, 위로부터 개혁은 또 다른 부작용이 잉태됩니다. 그래서 농민은 큰집의 부족한 개혁을 농민의 의견을 반영해 농협 스스로 보완하기를 주문합니다. 농협이 더 이상 복마전으로 불리는 것도, 농심이 상처를 받는 것도 이쯤에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그러려면 엄격한 잣대가 필요합니다. 비리의 토양을 걷어내고 비리의 싹이 될 제도든 내규든 관행이든 과감히 도려내야 합니다.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면 진정성을 의심받습니다. 여론 무마식 개혁은 정부가 바뀌고 비리가 터지면 또다시 개혁이란 이름의 메스를 들이댈 것입니다.

이번 개혁을 끝으로 농협은 정치권과 고리를 끊고 농민과 함께해야 합니다. 농민과 거리감이 생기고, 농심이 돌아서면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농협이 신용사업에 아무리 치중한다 해도 시중은행이 될 수 없듯이 농협은 농민과 함께하는 것이 나갈 길이고 진리입니다. 70년 전 윤봉길 의사가 ‘상공업이 발전해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해도 세상 인류의 생명창고 열쇠는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이라고 설파한 것이 지금도 진리이듯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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