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은 삶·숭고한 가르침 조선 큰 ‘선비’ 평가

초구-1658년 12월 효종이 중국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을 추진할 때 송시열에게 하사한 초구이다. 효종이 초구를 하사하자 송시열은 사치한 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하고는 끝내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자 효종은 " src="/news/photo/200811/789906_40525_3317.jpg" style="height:auto" />
초구-1658년 12월 효종이 중국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을 추진할 때 송시열에게 하사한 초구이다. 효종이 초구를 하사하자 송시열은 사치한 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하고는 끝내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자 효종은 "경은 나의 뜻을 알지 못하겠는가. 요동(遼東)과 계주(?州) 지방의 풍상(風霜)속으로 장차 함께 몰고 나가려는 것이다.(卿未諭予意耶 遼?風霜 將與同其驅馳也)"고 하고는 이 초구를 입고 함께 요동 지방을 정벌하러 가자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초구는 두 사람의 북벌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던 임진왜란(1592-1599)은 결국 승전보를 울리며 끝이 났지만 그 후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은 불과 2개월 정도의 짦은 기간에 조선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10여년의 인질생활 끝에 돌아온 효종(1649-1659)은 왕위에 올랐고, 조선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재야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우암 송시열(1607-1689), 동춘당 송준길(1606-1672), 미수 허목(1595-1682) 등 산림(山林)을 대거 등용했다. 특히 우암 송시열은 17세기의 인조·효종·현종·숙종 등 4대에 걸쳐 봉직하면서 조선의 국가 재건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우암 송시열 선생의 사상과 학맥 등에 대해 2회에 걸쳐 조명한다.

◇우암 송시열의 사상과 학맥

조선 17세기, 붕당정치 시대의 핵심인물이었던 우암 송시열은 27세의 나이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그때부터 학문적인 명성을 떨쳤다. 그 후 2년 뒤 1635년 봉림대군(훗날 효종)의 사부로 임명돼 약 1년 동안 그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우암은 병자호란으로 국왕 인종이 치욕을 당하고 봉림대군을 비롯한 소현세자 등이 인질로 중국 심양에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 낙향, 10여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효종 재위 동안 우암이 강력히 주장한 것은 바로 ‘북벌론’.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의 척화론을 계승해 청을 토벌하여 복수설치(復讐雪恥·복수하여 치욕을 씻음)하겠다는 것으로 무력으로 국제사회를 파괴한 청나라에 심복할 수 없다는 당시 국민정서에 기초했다. 그는 또 국가 간에도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에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대명의이론’(對明義理論)을 천명하기도 했다.

우암은 또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해 주자의 교의를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말을 할 때도 주자를 인용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학문적 연원은 조광조-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하게 계승한 것이다. 그는 또 18세기 정조대왕에 의해 송자(宋子)로 존칭되고 그의 문집은 송자대전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의 직(直)사상

우암의 철학과 삶은 ‘직’(直), 한 글자로 나타낼 수 있다. 그는 수신의 기초를 곧음을 나타내는 직(直)의 실천에 두었다. 도덕과 의리를 엄정히 판별했던 송시열은 직(直)하지 않으면 생의 도를 잃게 되어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모든 인간생활의 저력은 기상이고 그 것은 정직으로서만 길러진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정직은 수양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의 강인한 추진력은 정직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터.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천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 잡는다’(明天理 正人心)는 것인데 여기에서 천리, 즉 하늘의 이치란 우주만물을 아우르는 자연 질서의 이치를 뜻한다. 자연의 이치를 밝혀야만 사람의 마음을 그 이치에 따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에도 주의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 500년 중에서도 가장 혼란기였던 17세기에 살았던 우암은 일생을 주자학 연구와 공자의 ‘춘추대의’ 등의 구현을 시대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살았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조선 성리학은 조선학계의 정통으로 자리매김됐고 그의 동지및 많은 제자들의 광범위한 활약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이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율곡 제자들이 서인정파가 돼 17세기 조선사회 재건에 기여했다면 송시열의 제자들은 노론정파로 결집돼 18세기 조선 고유 문화 창달에 공헌한 것이다. <김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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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宋子大全)-
1787년(정조11) 평양 감사 이명식(李命植)의 주관하에 평양 감영에서 목판본(木版本) 
215권 102책의 `송자대전`을 출간했다. 그리고 송시열의 호인 `우암`으로 책의 제목을 하지 않고 성현을 부르는 관례에 따라 `송자(宋子)`로 해 책 제목을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명명했다. 우리나라 개인 문집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갖고 있는 책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송자대전(宋子大全)- 1787년(정조11) 평양 감사 이명식(李命植)의 주관하에 평양 감영에서 목판본(木版本) 215권 102책의 `송자대전`을 출간했다. 그리고 송시열의 호인 `우암`으로 책의 제목을 하지 않고 성현을 부르는 관례에 따라 `송자(宋子)`로 해 책 제목을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명명했다. 우리나라 개인 문집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갖고 있는 책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김창업의 초본(草本)을 화사(畵師)로 하여금 그리게 한 것. 평상복 차림에 복건을 쓰고 있는데, 세밀한 얼굴 묘사 등을 통해 송시열의 기품을 한층 드러내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김창업의 초본(草本)을 화사(畵師)로 하여금 그리게 한 것. 평상복 차림에 복건을 쓰고 있는데, 세밀한 얼굴 묘사 등을 통해 송시열의 기품을 한층 드러내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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