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田日報 걸어온 길

(상단) 창간 초창기 작업 모습, (하단 좌측) 대전 중구 문화동 시대 사옥, (하단 우측) 현 갈마독 사옥 전경
(상단) 창간 초창기 작업 모습, (하단 좌측) 대전 중구 문화동 시대 사옥, (하단 우측) 현 갈마독 사옥 전경
‘대전·충청을 대표하는 언론 1위, 충청권 언론 브랜드 파워 1위….’

대전일보가 이같은 수식어 앞에 떳떳할 수 있는 것은 창간 58년동안 한결같이 정론직필을 다짐하고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대전일보는 수많은 시련속에서도 충청지역을 대변해왔고 국가 발전을 위해 역사의 현장을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며 언론의 책무를 다해왔다.

대전일보 58년 역사는 곧 권력에 대한 감시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일보는 전쟁의 포성이 한반도를 휩쓸던 1950년 8월 27일 전시 속보판으로 대전시민들에게 처음 선보였다. 당시 전시속보판은 급박한 전시 상황은 물론 어려움을 딛고 살아 가는 민초들의 삶을 그대로 담았다. 초기 지면에는 전쟁의 참혹함이 묻어났지만 종군 기자들의 생생한 기사로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하루 1만부가 팔렸을 정도로 인기를 구가했다.

타블로이드 배판 2면을 증면해 성장을 거듭하던 대전일보였지만 재정 압박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56년 선화동(현 갤러리아동백점 옆)에 사옥을 신축·이전하며 사세를 확장했지만 재정난이 가중되자 남정섭(전 대전일보 회장)·박병배씨(전 대전일보 사장)를 새로운 주주로 맞이하는 용단을 내렸다.

당시 남정섭 회장은 1963년 박병배 사장 소유 주식을 모두 인수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증자를 단행했고, 각종 설비와 인력을 충원해 중부권 최대 신문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대전일보는 1973년 경영난을 겪던 중도일보를 매수·통합했다. 1970-80년대 대전일보가 올곧은 언론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과는 전혀 무관했다.

대전일보는 중부권 최대 정론지로 우뚝 서기까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사오입 개헌 파동을 비롯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담았고, 3·15 부정선거 뒤에는 대전고를 중심으로 한 3·8 의거를 현장감있게 보도, 4·19 혁명의 촉매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5·16 이후 유신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대전일보는 한국 언론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탄압을 받았지만 정론직필의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두번에 걸친 필화사건으로 인해 기자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세무사찰 등 독재 권력의 언론 탄압을 묵묵히 견뎠다.

필화사건의 첫 탄압은 196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사 정권은 당시 김정욱 편집부장이 쓴 방송 시나리오 ‘송아지’가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했다는 이유로 김 부장을 구속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김 부장에게 무산 계급을 선동했다는 죄목을 씌웠다. 등장 인물이 무산계급과 유산 계급을 표방하고 무산 계급의 수탈 상황을 묘사해 북한의 선전 및 활동에 동조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김 부장은 구속 며칠만에 석방됐고, 법원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60년대에는 극단적 반공 정책으로 인해 인혁당 사건과 동백림 사건 등이 잇따라 터졌지만 편집부장 구속 사건은 대표적인 언론탄압으로 지금까지도 언론계에 회자되고 있다.

언론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8년 7월에는 이지영 당시 사회부기자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필화 사건에 휘말렸다. 정론직필로 기자가 구속되자 언론 탄압에 대한 민심이 들끓었고, 결국 검찰은 구속적부심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유신정권이 기세를 더해가던 1975년 5월. 대전일보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언론사상 처음으로 국세청 본청의 세무 사찰을 받은 것이다.

세무세찰은 국세청 본청 특수조사국이 직접 담당했고 3개월여 동안 강도높게 진행됐으나 탈세 혐의를 찾지못해 결국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당시 세무사찰을 두고 세간에는 고위층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는 설과 대전일보사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남정섭 대전일보 회장이 신문협회 회장단 자격으로 청와대 회의에 참석했을 때도 최고위층으로부터 대전일보가 정권에 비협조적이라는 위협적인 발언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제 5공화국 출범 등 역사적인 격동기에도 대전일보는 한 걸음 내딛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 때도 대전일보는 역사의 현장을 지켰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각종 캠페인 전개와 함께 파격적인 증면을 단행, 독자들의 만족도를 높여줬다.

1992년 5월부터는 전국에서 대표적인 유력 지방신문 6개사(춘추사)가 공동으로 일본과 홍콩, 모스크바, 워싱턴, 파리 등지에 해외특파원을 파견, 세계화 추세에 능등적으로 대처하기도 했다.

IMF 외환위기를 맞아 한때 경영상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03년 8월 대전 갈마동으로 사옥을 이전하면서 제 2의 창간 선언, 사원들의 일치단결로 사세가 다시 신장해, 중부권 최고의 신문으로서 위치를 더욱 굳건히 다지고 있다.

대전일보가 지역민과 호흡하며 고락을 함께해 온 결과는 여러 조사기관의 여론조사를 통해서 입증된 바 있다.

지난 2007년 9월 지역 인터넷뉴스인 디트뉴스 24가 전체 응답자 3300명을 대상으로 대전 대표 브랜드 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전일보를 대전·충남 대표 언론이라고 지목한 응답자는 과반을 훌쩍 넘는 59%(1956명)에 달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8월 대전일보가 한남대와 공동으로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충청인 의식조사’에서도 응답자의 2명 중 1명(47.3%)은 대전일보가 대전·충청을 대표하는 언론이라고 답했다.

지난 2005년에는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와 함께 지역 각 분야별 전문가 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49%가 ‘가장 영향력 있는 대전·충남 언론’으로 대전일보를 꼽았다. 신문 방송을 통틀어 지역 언론 가운데 대전일보가 `영향력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당시 시사저널은 이 설문조사 결과를 ‘대전일보, 조·중·동 눌렀다’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로 게재한 바 있다.

이처럼 대전일보가 58년간 지역 최고 언론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지킬수 있었던 데에는 지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확하고 차별화된 기사를 발굴해 왔기 때문이다.

대전일보는 이를 기반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독자의 눈과 귀를 밝히는 언론의 책무와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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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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