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고장, 충주

탄금대
탄금대
충주는 기상 높은 고구려의 유적과 문화에서 통일신라, 조선시대의 유적까지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고즈넉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중원고구려비와 통일신라 시대 국토의 중심에 세운 중앙탑, 천년의 시간을 두고 우륵이 가야금을 타고 신립장군이 산화했던 탄금대 등 하루 나들이로 우리나라 역사를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다. 중원문화의 중심지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충주댐 왼쪽 문수산 자락에 자리 잡은 탄금대는 가야금 소리와 칼 소리가 함께 들리는 환청에 사로잡히는 곳이다.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곳인데다 조각공원, 탄금정, 문화원, 야외음악당 등이 있어 사색에 잠겨 산책하기엔 더없이 좋다.

일교차가 큰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해가 솟으면 붉게 물드는 날이면 이곳에 나라 잃은 우륵의 애절한 가야금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왕산악과 박연 등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불리는 가야의 음악가인 우륵이 제자들과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가야금을 타던 곳이다.

대가야국 사람이던 우륵은 신라 진흥왕 12년(551년) 가야에서 신라로 투항했다. 우륵은 진흥왕의 배려로 하림궁에 머물며 가야금을 연주하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하림궁은 현재 탄금대에 있었다.

우륵이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탈 때면 연주를 들으러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부근에 마을이 이뤄졌다. 칠곡리(현 칠금동), 금뇌리(현 금능리), 청금리(현 청금정)가 이때 생겨났다. 우륵이 탄금대를 거닐다 쉬었다는 금휴포도 오늘날까지 보존돼 있다. 진흥왕은 우륵의 가야금곡을 궁중음악으로 승격시켰고 이후 185곡의 가양금곡을 만들게 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깃든 이곳은 공교롭게 천년 뒤에는 피의 격전지가 됐다. 신립 장군(1546-1592년)이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 이곳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자 선조는 8000여 명의 군사를 신립 장군에게 주며 왜군을 막으라고 명했고 신립 장군은 왜군의 상경을 막기 위한 장소로 충주를 최적지로 꼽았다.

그러나 아픔만 남겼던 이 전쟁에서 당시 최고의 명장이었던 신립 장군도 허망하게 전사했다. 넓은 벌과 남한강을 뒤로하고 배수진을 친 신립 장군은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수많은 왜적과 조총 앞에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탄금대 건너편에 우뚝 솟은 7층 석탑이 국보 제6호인 중앙탑이다. 높이 14.5m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높다. 석탑은 남한강변 높은 토단 위에 2층 기단 위로 7층 탑신이 웅장하게 솟아 있다.

정식 명칭은 탑평리 7층 석탑이지만 통일신라 당시 국토의 중앙에 건립한 탑이어서 중앙탑이라고 부른다. 주변이 중앙탑 사적공원으로 지정돼 곱고 넓은 잔디밭이 깔렸으며 조각 등 조경시설이 잘 가꿔져 있고 남한강과 어우러진 경관이 아름답다.

바로 지척에 국보 제205호인 중원고구려비가 있다. 1970년 비석리(충주댐 옆)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척경비로 장수왕의 아들인 문자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700여 자에 이르는 심하게 마모돼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200여 자에 불과하다. 발견 전 마을 아넥네들이 빨래판으로 오래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높이 203㎝, 폭 55㎝로 전체적인 외형은 만주 집안현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릉비와 비슷하나 크기가 작다. 비문은 고구려가 신라와 형제처럼 지내기를 원하고 이에 신라왕이 공손히 응했다는 내용이다. 5세기 장수왕이 충주까지 진출해 남한강 유역을 장악했다는 얘기다. 남한에서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삼국시대 국가간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중부 내륙 고속도로 감독 IC를 나와 38번 국도 앙성 방면으로 가다 보면 앙성온천 지구가 나오고 699번 도로로 우회전하면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 탄금대가 차례대로 나온다.

시간이 있다면 수안보면 미륵리 쪽으로도 발길을 돌려보자. 고려 초기에 창건돼 몽골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굴사원 터가 있다.

이 절터에는 돌을 쌓아 조성한 석불입상(보물 제96호), 5층석탑(보물 제 95호), 충북 유형문화재인 석등, 3층 석탑 등이 일렬로 늘어선 채 남아 있다. 이외에도 건물지의 초석, 사각성, 3층 석탑, 돌거북, 당간지주 등 수많은 석조물이 즐비하다.

이 석굴사원은 큰돌을 이용해 벽을 쌓아 올린 뒤 목조가구를 올려 완성했던 것으로 경주의 석굴암을 본떠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석굴 벽에는 감실을 조성해 여래좌상과 삼불좌상을 새겨놓았다.

<송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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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신립장군
충장공 신립장군
탄금대 건너편에 우뚝 솟은 국보 제6호인 중앙탑은 7층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중 가장 높은 탑이다.
탄금대 건너편에 우뚝 솟은 국보 제6호인 중앙탑은 7층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중 가장 높은 탑이다.

송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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