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시특보판 발행 지역민 눈·귀 역할

1982년 문화동 사옥
1982년 문화동 사옥
대전일보가 오늘로 지령 1만8000호를 맞았다.

전시 타블로이드 판으로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문을 발행하기까지 수 많은 역경이 뒤따랐지만 대전일보는 58여년 동안 한결같이 정론직필을 다짐하고 실천해왔다.

대전일보는 1950년 10월 3일, 전쟁의 포화속에서 전시 특보판으로 첫 선을 보였다.

지면에는 급박한 전시 상황부터, 어려움을 딛고 살아 가는 민초들의 삶까지 민초들의 삶을 그대로 담아냈다.

당시 대전시 인구가 7만-8만명에 불과했지만, 이같은 전시 상황을 담은 신문은 하루 1만부가 팔렸을 정도로 인기를 구가했다.

이후 타블로이드 배판 2면을 증면해 성장세가 이어졌지만 재정적인 압박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56년 선화동(현 갤러리아동백점 옆)에 사옥을 신축, 이전하며 사세를 확장했지만 재정난의 가중으로 대전일보는 임원진을 새로 구성하는 용단을 내렸다.

당시 남정섭 회장은 박병배 사장 소유 주식을 모두 인수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증자를 단행했고, 각종 설비와 인력을 충원해 중부권 최대 중론지로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

경영이 점점 안정세를 보이자 대전일보는 1973년 경영난을 겪던 중도일보를 매수 통합했다.73년 5월 중도일보를 매입통합한 것은 80년대 외압에 의한 신군부의 언론통폐합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이처럼 숱한 변혁과 온갖 역경을 겪었지만 대전일보는 언론의 책무와 역할을 다 하기 위해 펜끝을 날카롭게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사사오입 개헌 파동을 비롯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물론, 3·15 부정선거 뒤에는 대전고를 중심으로 한 3·8 의거를 현장감있게 보도, 4·19 혁명의 촉매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5·16 이후 유신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대전일보는 갖은 탄압과 시련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두번에 걸친 필화사건으로 인해 기자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세무사찰 등 독재 권력의 언론 탄압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필화사건의 첫 탄압은 196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사 정권은 당시 김정욱 편집부장이 쓴 방송 시나리오 ‘송아지’가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했다는 이유로 김 부장을 구속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김 부장에게 무산 계급을 선동했다는 죄목을 씌웠으나 법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60년대에는 극단적 반공 정책으로 인해 인혁당 사건과 동백림 사건 등이 잇따라 터졌지만 편집부장 구속 사건은 대표적인 언론탄압으로 지금까지도 언론계에 회자되고 있다.

언론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8년 7월에는 이지영 당시 사회부기자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필화 사건에 휘말리자 전국에서 언론 탄압에 대한 민심이 들 끓었고, 결국 검찰은 구속적부심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유신정권이 기세를 더해가던 1975년 5월. 대전일보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언론사상 처음으로 세무 사찰을 받은 것.

세무세찰은 국세청 본청 특수조사국이 직접 담당했고 3개월여 동안 진행된 조사에서 영업수익에 대한 각종 세금을 추징당하는 등 홍역을 치렀다.

당시 세무사찰을 두고 세간에는 대전일보의 비판적 논조를 못 마땅히 여긴 최고 권력자의 지시

에 의한 정치적 보복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 때문에 대전일보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창간 이후 일관되게 유지해온 투명 경영 원칙과 사원들의 단합된 힘이 더해져 언론 탄압을 이겨냈다.

제 5공화국 출범 등 역사적인 격동기에도 대전일보는 한 걸음 내딛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 때도 대전일보는 역사의 현장을 지켰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각종 캠페인 전개와 함께 파격적인 증면을 단행, 독자들의 만족도를 높여줬다.

1992년 5월부터는 전국에서 대표적인 지방신문 6개사(춘추회)가 공동으로 일본과 홍콩, 모스크바, 워싱턴, 파리 등지에 해외특파원을 파견, 세계화추세에 능등적으로 대처하기도 했다.

지역 사업에도 앞장섰다.

대전동물원과 서대전시민공원 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대전지방법원 가정지원, 대전지방경찰청을 출범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신춘문예 모집, 3·1역전 마라톤 개최, 루오전 개최 등으로 지역 문화 수준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신두리 모래언덕 보전, 행정도시 유치 등도 빼 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오대양 사건,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전주교도소 탈주 사건, 건양대 의료사고, 한국타이어 근로 연쇄사망 사건 등을 특종 보도해 국민의 알권리 충족에도 충실했다.

IMF 외환위기를 맞아 한때 경영상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03년 8월 대전 갈마동으로 사옥을 이전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했다.

대전일보와 지역민들이 함께 호흡하면서 고락을 공유해 온 결과는 2005년 유력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의 언론매체별 영향력 여론조사에서 입증된 바 있다. 신문방송을 통틀어 지역 언론 가운데 대전일보가 1위를 차지한 것. 이는 독자들의 기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충분히 가늠케했다.

대전일보가 1만8000호를 발행할 수 있었던 데는 충청인이라는 든든한 동반자가 버팀목이 돼 주었기에 가능했다. 이를 기반으로 삼아 대전일보는 앞으로도 역사의 현장에서 독자의 눈과 귀를 밝히는 언론매체로서 사명을 다해 나갈 것이다.<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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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은행동 사옥
1964년 은행동 사옥

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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