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굴교회에 새겨진 기독교 '수난의 역사'

터키 카파도키아(Cappadocia)

“천자산이 옷을 벗은 누드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는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대규모 기암지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바위들의 군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의 장가계, 천자산, 계림 그리고 미국의 그랜드 캐년, 베트남의 하롱베이 등 그 어느 곳에 비유해도 손색이 없는 절경이다. 옷을 벗은 누드의 모습으로 매끄러운 피부를 자랑하는 산이다.

이곳의 지층은 수억 년 전에 일어났던 에르제스 산의 화산폭발로 형성된 것이며 그 때 화산재와 용암이 수백 미터의 높이로 쌓이고 굳어져 응회암의 용암층을 만들었고, 그 후 풍화 작용으로 침식되면서 단단한 부분만 남아 이루어진 것이 지금의 카파도키아다. 매끄럽고 아름다운 거대한 바위에 군데군데 검은 바위굴의 구멍이 들어나 보인다. 그 동굴 안에 바로 이곳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직접 보지 않고 어찌 카파토키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카파도키아에는 100여 개의 교회가 있고, 그 중 150여 곳에 벽화와 부조가 남아 있다.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은신처로 사용하기 위해 바위를 뚫거나 동굴을 파내려간 곳에 교회도 주택도 만들어졌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돔 형식의 벽과 천정에 화려하게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아름답다. 지하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동굴교회를 보고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이곳을 ‘괴레메’라 부른다. 야외 박물관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자연경관 그대로가 박물관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괴레메 암굴 교회와 집들은 이곳에 9세기 이후부터 대규모 기독교인들이 정착하였음을 말해 준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교회를 장식하기 시작한 11세기의 ‘기둥이 있는 교회들’에서 비잔틴 예술의 황금시대를 엿볼 수 있다. 그림의 주제와 섬세한 표현 등에서 이곳의 그림이 전문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벽면과 아치형 기둥위에 그려진 성화 속 인간의 모습은 우아하고 아름답다. 물에 젖어 비쳐 보이는 의상 속의 뽀얀 살결, 슬프면서도 자애가 넘치는 표정, 그것들은 전문화가의 완벽한 표현이다.

괴레메에 수도사들이 거주했으며 성지순례의 장소로 이용됐다는 것은 벽 위에 남겨진 순례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흔적으로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바위를 4층으로 깎아 만든 교회와 터널로 이루어진 여자들의 수도원이 있고, 성모마리아와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세례 요한의 모습 등 성화가 그려진 엘말르 교회,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성 바바라 교회, 성 조오지우스와 성 테오도루스가 용과 싸우는 장면이 그려진 뱀 교회를 비롯하여, 푸른빛으로 아름다운 벽화를 자랑하는 가장 큰 토칼르 교회가 있다.

토칼르는 다른 석굴에 비해 굉장히 넓으며, 원통형 천장과 벽에 그려진 다수의 프레스코화가 10세기 후반 비잔틴 미술의 명작으로 그 아름다운 색채로 발길을 잡는다. 맨 꼭대기에 그려진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잉태를 전하는 천사를 비롯하여 ‘엘리자베스와 어린 요한’, ‘골고다로 가는 그리스도의 수난’, ‘물을 와인으로 만드는 예수’ 등 풍부한 기독교의 주제들을 아름다운 색채로 잘 표현해낸 프레스코화의 작품 앞에서 그저 놀라움으로 멍해져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괴레메 교회들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수 없는 수난과 하나님에 대한 동경을 진하게 느끼며 카파도키아의 자연적인 기암괴석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위치히사르 요새에 도착한다. 원주민들이 ‘요새’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작은 바위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타워처럼 보이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 위치히사르와 오르타히사르가 나타난다. 토착민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던 곳이다.

비잔틴 시대와 오토만 시대에는 위치히사르의 거대한 암석에서 사람이 살았으며 현재에도 토착민들의 정착지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가장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기암 앞에서 스케치북을 펴본다. 카파도키아의 명물, 세쌍둥이 버섯바위들의 절경이 스케치북으로 옮겨진다. 예로부터 이곳은 수도사들이 살던 곳이다. 높이가 40m에 달하는 원추형 기암의 꼭대기에 현무암의 모자를 쓰고 있는 완전한 버섯모양의 기암들이 괴물같이 하늘로 솟아있다.

1970년대 발굴되어 세계인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던 또 하나의 역사가 이곳에 있다. 바로 우리들을 놀라게 했던 지하도시, ‘데린쿠유’다. 동굴주택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곳은 마치 지하로 파내려간 개미들의 집을 상상 하게하는 대규모 미로의 동굴이다.

마을에서 기르던 닭 한 마리가 땅을 파고 들어간 다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조금씩 파 들어가 발굴하게 된 것이 바로 지하묘굴, ‘데린쿠유’였다고 한다.

기원전 400년경에 만들어져 오랜 세월 지하에 감추어졌던 지하도시는 한 도시에 2만 명 정도가 살았으며, 지하 12층 정도를 내려가는 대규모 도시형이다. 이와 같은 지하도시가 이 지역에 30개정도 있으며 현재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는 곳은 두 개소이다.

로마시대 기독교의 탄압으로 지하로 파고든 신앙인들의 생활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지하에서 가축을 기르고, 포도주를 만들었던 흔적, 통로와 환기구, 울림통이 있고, 지하의 각층으로 연결되는 통로, 예배당, 학교, 침실, 부엌, 우물 등이 있다. 또 지하 교회 앞 기둥에는 죄지은 자를 벌하여 매어 두었던 돌구멍도 보인다. 물세례를 주었던 성스러운 곳도, 외부의 침입을 막는 둥근 맷돌의 돌덩이도 모두가 이곳에서 살다간 이들의 지혜와 아이디어들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살아 남기위한 기독교인들의 애절한 소망의 흔적들이어서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가장 큰 지하도시 ‘데린쿠유’에는 4만 명도 살았으며, 이곳 ‘카이마크르’에는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지하에서 생활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바로 ‘믿음의 힘’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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