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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혼혈화가 두렵다

2008-01-30기사 편집 2008-01-29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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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 방문 때의 일이다. 몇몇 교수들과 어울려 식사 중인데 옆방에 든 다른 손님들이 매우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대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더러는 한국말 비속어도 섞여 들렸다. 내가 “우리 조선족들인가 보죠?” 했더니 옆자리의 한 조선족 교수가 말했다. “만주족입니다. 언어도 문자도 잃어버린 가련한 종족들이죠.” 말 속에는 만주족들에 대한 경멸의식이 깊이 배어 있었다. 같은 소수민족이면서도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조선족으로서의 자부심이 짙게 깔려 있는 말이기도 했다. 고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으나 어투나 골상만으로도 금방 만주족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호구변경을 해 가며 동화되어 버렸지만 끝내 ‘만주족’임을 숨기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 두 번씩이나 ‘천하’를 호령하던 만주족들이 이토록 급속하게 역사의 미아로 전락하게 된 까닭은 ‘문화혼혈’ 현상 때문이었다. 소수의 지배자들인 만주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한족 사회에 이식시키는 데에는 힘을 썼지만, 지키는 일에는 소홀했다. 그 결과 이식과 전수가 수월한 생활문화는 빠르게 한족 문화 속에 침투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식과 전수가 어려운 언어나 문자는 달랐다. 절대 다수인 한족의 언어와 문자가 거꾸로 절대 소수인 만주족들의 언어와 문자를 지배해 들어왔다. 만주족 고유의 언어와 문자는 빠르게 소멸되고, 이에 따라 전승 수단을 잃어버린 문화는 급속하게 한족의 것으로 동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더욱 슬픈 일은 이것들을 회복하고 복원시킬 가능성조차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린 까닭이다.

지금 나라 안이 온통 영어교육 문제로 들끓고 있는 형국이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을 둘러싼 논쟁이 날마다 귀를 따갑게 하고 있는 때문이다. 영어가 국제적 공용어가 되다시피 한 현실에서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어 능력이 개인이나 집단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주요 잣대가 된 지도 오래다. 그러니 국가마다 영어교육을 강화하고자 하는 일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는 마당에 이에 발맞춰 나아가고자 하는 새 정부의 방침을 탓하고 잡아끌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박수하고 앞장서 격려해 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자꾸 서운하고 씁쓸해지는 기분을 숨길 수 없다. 어느 구석에서도 위기에 처해 있는 한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영어교육만 앞세우다가 자칫 민족어를 잃는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어 능력이란 튼튼한 모국어 능력을 기초로 할 때에라야 더욱 쓸모 있는 것이 된다. 모국어를 잃어버린 외국어 능력이란 모래 위의 집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영어에 능통하다 해도 완전한 영국인이나 미국인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만주족들이 모든 것을 다 잃고 중국인으로 동화되었어도 여전히 만주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 사람들은 흔히 ‘가진 것 없는 설움’을 말한다. 돈 없는 설움, 집 없는 설움, 부모 없는 설움. 그러나 모국어를 갖지 못한 설움은 이 세상 어떤 설움보다도 절절한 설움이다. 1930년대,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에 놓였을 때 이 땅의 지식인들이 목숨 걸고 한글운동에 앞장섰던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같은 우리의 모국어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 가치와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와, 돌보고 가꾸기를 외면한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한글의 위기를 방치한 채 추진되고 있는 영어 공교육 강화는 한글의 혼혈화를 빠르게 재촉할 것이며, 이는 결국 모국어 상실을 피할 수 없게 할 것이다. 영어 공교육을 강화하는 일 못지않게 한글 공교육을 강화해야 하는 일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주족의 비극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