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인들은 왜 서산 마애삼존불을 외진 산 바위벽에 어렵게 모셨을까? 6세기 말 한강유역을 차지한 백제는 고구려와 한창 사이가 좋을 때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했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인해 남으로 수도를 천도했고 여기에 산라가 한강 유역을 빼앗아 가버려 중국과는 더 이상 한강유역에서 통할 수 없게 됐다. 궁여지책으로 중국 산둥반도와 가장 가까운 당진, 태안이 교역항이 됐고 서산은 그 당시 수도인 웅진(공주)이나 사비(부여)로 가는 길목이 됐다. 그 길목에는 안전하고 평탄한 교역이 이루어지도록 큰 절을 세웠을 테고 그 증거로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이 남아 있다.

▲보원사 터에는 석조(石造) 하나가 장중한 멋을 지닌 채 철책에 싸여 있다. 길이가 3.5m, 높이가 90㎝이르지만 하나의 돌로 이루워진, 보기 드문 유물이다. 석수가 정 하나로 그 깊이를 파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보물 제 102호로 지정돼 있는 석조는 큰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고 그 안을 파낸 모양을 하고 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밑바닥 한 쪽에 물이 빠지는 구멍이 하나 있다.

▲휘어진 나무의 곡선미를 그대로 살려 지은 문에서 대담함이 느껴진다. 개심사 안에 있는 심검당은 부엌문을 휘어진 나무를 사용, 자연스런 미감이 돋보인다.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박시동이라는 목수의 이름도 들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김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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