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지만 연말연시는 시간이 참 빨리 간다. 특히 필자에게는 올해 유난히 빠른 것 같다. 시무식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벽에 걸린 2008년 1월 달력이 열흘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필자는 지난 연말 국립대학 학장(강원대 수의학부대 학장)을 지내다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있는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선임연구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구원 내 주요 연구부서를 돌면서 연구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점 진행업무를 파악하고 있는데 벌써 2개월째로 접어든다.

지난 연말에는 자리를 옮기다 보니 주변에서 여러 가지 질문도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다. 학장 생활을 마다하고 뭐 하러 그곳으로 가느냐는 것이다. 과학기술계 트렌드가 출연연구소에서 교수로 가려고 하는데, 왜 당신은 반대의 길로 가느냐는 목소리가 상당했다.

하지만 필자가 국립대 학장으로 있다가 출연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출연연구소의 가능성이다. 출연연은 대학과는 연구시스템이 다르다. 대학이 자유스러운 연구가 경쟁력이라고 한다면 출연연은 조직력이라고 볼 수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밀집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출연연만의 장점이다. 전문화된 조직력은 국내 다른 연구조직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경쟁력을 위해 출연연이 팀 플레이를 해야 하는 이유다.

또 한 가지는 대덕연구개발특구의 가능성이다. 대덕연구개발특구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기술 집적지역이다. 30여 년 동안 IT와 BT(바이오기술), NT(나노기술)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인력과 장비 등 모든 인프라가 구축돼 있다. 외국에도 대덕특구 규모의 인프라를 갖춘 곳은 거의 없다. 이런 대덕특구만의 경쟁력을 살려야 한다. 21세기 융합기술의 시대에 대덕에 모여 있는 각 연구그룹과의 융합은 지역의 최대 경쟁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한의학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이 필자를 대덕으로 이끌었다. 한의학은 아시다시피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민족의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학 만큼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서 홀대받는 학문도 드물다. 왜일까. 한의학의 홀대받는 상황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유신 이후 전통의학을 포기하고 서양의학을 받아들인 일제는 그들의 의학정책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했다. 이후 한의학은 해방 이후 상당기간 동안 암흑기를 거쳐 70-80년에 들어서야 존재를 인정받았으며, 2000년대 들어서야 위상을 조금씩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역할도 이런 근대 한의학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한의학연구원의 가장 큰 역할을 꼽으라면 한의학의 과학화와 표준화, 그리고 세계화다. 반세기 이상 끊어진 한의학의 역사를 복원하고 한의학이 제대로 된 의학으로 바로서기 위한 연구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세계 전통의학시장은 2000억 달러 규모로 추산된다. 그리고 이런 전통의학시장 선점을 위해 현재 다국적 제약기업을 필두로 선진 각국들이 전통의학 분야 연구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새삼스럽게 한의학의 장점을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필자가 관련이 있는 천연물 분야에서 한의학의 장점은 명확하다. 후보물질을 발굴해 다양한 실험을 거쳐야만 되는 서양의학과는 달리 경험의학인 한의학은 수백 년,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임상정보가 기반이기 때문이다.

연말 연초에는 누구나 계획을 세운다. 다른 해보다 올해의 계획은 녹록지 않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많이 듣는다. 새정부 출범에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희망에 무게를 싣고 싶다. 21세기 과학기술의 시대에 과학기술과 우리나라 전통의학인 한의학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을 부탁드리고 싶다.

권명상<한국한의학연구원 선임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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