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딩우롱을 만나다

둥딩산 중턱, 하염없이 이어지는 빈랑나무와 녹색 차밭의 황홀한 자태에 젖어 행복감을 만끽하다보니 세상사의 번잡함을 잊게 되고 자연스레 겸손한 마음이 일어 마음이 가지런해 지고 고요해진다. 마치 좋은 벗과 향기로운 찻잔을 마주하는 순간과 같다. 염미화정(廉美和靜)이란 말이 떠오른다. 중국의 다도는 염미화정(廉美和靜)에 기본은 두고 있다고들 한다. ‘염(廉)’이란 마음을 겸양하게 다스리는 것을 뜻하고, ‘미(美)’란 세상 만물을 모두 아름답게 보는 것을 뜻하며, ‘화(和)’란 서로 화합함을 뜻한다. 그리고 ‘정(靜)’이란 마음의 고요함을 찾는 것을 뜻한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도 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참선을 하는 것과 같은 묘미가 있다는 말이다. 번잡한 속세를 뒤로하고 앉은 차 한 잔의 고요(靜) 속에 즐거움(怡)이 있고, 그 속에 참된(眞) 나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차의 본성은 고요하고 사색적이고 이지적이다. 찻잔 속에 찻잎이 퍼지며 연두색 색깔을 토해내면 그 속에는 우주의 순환을 보는 듯한 정신적 심의(心意)가 싹튼다. 그런 점에서 하늘의 기운(비, 이슬, 햇빛)과 땅의 기운을 머금고 자란 찻잎은 대자연의 일부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키우는 날개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6대 다류(녹차,백차,황차,청차,홍차,흑차) 가운데 청차를 대표하는 우롱차(烏龍茶)는 차나무의 품종이기도 하면서 차의 이름이기도 하다. 타이완의 둥딩우롱차(凍頂烏龍茶)는 잎의 모양이 선형에 가까운 녹차와 구형의 철관음의 중간형태로 차를 우려내면 밝은 황금색을 띠는데 우려낸 찻잎을 보면 찻잎 둘레가 붉고 그 안은 담녹색을 하고 있다. 사실 다른 지방의 차보다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타이완의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차가 둥딩우롱차라는 브랜드로 판매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산길에 둥딩우롱을 전문으로 만들고 판매하는 생산자를 찾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다 보니 런닝셔츠 바람의 60대의 부부가 첫손님을 반긴다. 직접 자신들이 재배하고 수확해서 만든 차를 꺼내어 선보인다. 물이 끓는 사이 주인장은 우롱차의 유래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옛날 어느 산골마을의 한 밭 한가운데에 큰 차나무가 있었는데 그 차나무를 휘감고 살고 있는 큰 검은 뱀이 있었단다. 그 뱀은 온순해서 절대로 사람을 물거나 해치는 일이 없이 동네 사람들과 잘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농부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밭일을 하다가 그만 일사병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때 그 뱀이 차나무 위로 올라가 입으로 찻잎을 따서는 그 농부의 입에 넣어주었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혼절했던 농부가 깨어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검은 큰 뱀(烏龍)이 사는 차나무라 하여 이 나무를 우롱(오룡)차 나무라 이름지어 부르게 되었단다.

둥딩우롱은 제다방법이 포종차와 비슷해, 문산포종과는 자매계열로 본다. 주인장이 조심스레 내놓는 검은 녹색의 차 알갱이들은 단단한 반구형으로 잘 말려져 있다. 세차 후에 우려내는 첫 탕의 색은 투명하고 그야말로 밝은 황금색이다. 잔 위로 올라오는 향기는 계화꽃 향기에 가깝다고나 할까? 주인장은 차를 입에 대기 전에 문향배(聞香杯 향기를 맡기 위한 찻잔)로 먼저 향을 맡아보라 권한다. 문향배에서는 특이하게도 불에 그을린 듯 독특한 차향이 올라온다. 밥을 약간 태울 때 나오는 향과 비슷한 구수하면서 달콤한 향이다. 향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하니 유념 후에 건조시킬 때 사용하는 홍배(烘焙) 과정의 불 냄새라고 일러준다. 맛은 달고 부드러우며 목구멍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신선한 단맛과 진한 향기가 일품이다. 첫잔을 비우니 고삽미와 단미가 정말로 고르게 올라오면서 바로 단침이 따라 올라온다. 이전에 둥딩우롱을 마셔본 바가 없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곳 둥딩산 우롱의 절묘한 맛과 향이 입 안 가득 황홀한 여운을 남긴다. 선인들이 명차라 이름한 연유를 깨닫게 하는 순간이다.

타이베이로의 귀환길, 타이완에서 가장 먼저 상업적 찻집으로 성공했다는 경독원(耕讀園) 찻집을 찾았다. 중국의 전통 정원과 가구 배치가 이색적이다. 유기농 차와 유기농 음식을 주 메뉴로 한다. 프렌차이즈 커피숖들이 즐비한 타이완의 도심에서 여전히 대나무와 고가구로 장식된 고풍스런 찻집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청량하고 향기로운 둥딩산의 우롱차와 소동파가 고안해서 만들었다는 동파육(통삼겹살찜)의 조화는 그야말로 절묘하다. 시장기를 달래는 한 입의 기름진 동파육과 한 모금의 둥딩우롱차에는 따스함과 감미로움이 있고, 입안 가득한 짙은 향기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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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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