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속 담겨진 찬란한 불교문화에 넋을 잃다

인도의 우마차/ Markerpen / 2007
인도의 우마차/ Markerpen / 2007
한국화가 박생광 선생이 인도를 방문하고 그의 작품세계가 강력한 변신을 가져옴으로써 그가 우리나라 화단의 거목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선배들의 졸업작품전에 참여하기 위해 두 점의 작품을 준비했다. 작품 준비가 거의 끝이 난 상태에서 창운 이열모 선생은 나에게 인물 작품은 전시회에 출품을 하고, 산수 작품은 전시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산수 작품도 전시를 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어 생각한 나머지 박생광 선생님께 지원을 얻고자하였다. 나는 산수 작품을 박생광 선생님께 보여 드리고 작품이 어떠냐고 여쭈워 보았다. 한동안을 말씀 없이 그림을 내려다보시던 박생광 선생은 ‘대가가 그렸으면 대작이라 하겠다.’하고 말씀 하셨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대가도 없었고, 대작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창피스러운 우둔한 청년의 고집만 있었을 뿐이다. 한 장의 그림을 통하여 살아가는 진리와 겸손을 가르치신 박생광 선생의 인자하신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가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아잔타 석굴의 프레스코화를 찾아 나섰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과 회화 발전의 핵심 요소라 말 할 수 있는 벽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아잔타 석굴은 뭄바이에서 450km, 아우랑가바드에서 106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달리던 버스가 아잔타 석굴 관광단지 주차장에 멎는다. 주차장에서 석굴로 올라가는 전용 셔틀 버스를 타고 10분쯤 올라간다. 산행 입구에 손가마꾼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가마를 타라고 종용을 한다. 얼마나 멀기에 이런 사람들이 있나 하면서 긴장감도 생긴다. 그러나 10분쯤 계단을 오르니 아잔타의 모든 석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석굴은 지상으로부터 계단을 통하여 약 100m 오른 ‘인드야드리’ 언덕 중턱에 수평으로 1.5km에 걸쳐 전개된다. 모두 29개의 석굴이 데칸고원의 깊은 숲을 흐르고 있는 와고레강(Waghore River) 줄기를 따라 아름답게 이어져있다. 기암절벽의 단애를 흘러내리는 시원스런 폭포와 곡선을 그리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 전망대로 오르는 아기자기한 계단들과 오솔길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이 석굴들은 B.C 2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A.D 5-6세기에 완성을 한 인도 불교문화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석굴은 숲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영국군 병사 ‘존 스미스’가 호랑이 사냥을 하기 위하여 이 계곡에 내려왔다가 1819년에 발견하였다. 1100년 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벽면에 그려진 회화는 주로 불교의 전래 내용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인도 회화사상 유례없는 걸작으로 이 양식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해졌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 작품은 오히려 숲 속에서 인간의 손에 닿지 않는 오랜 세월을 보낸 것이 작품을 보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먼지를 제거하고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벌써 벽화의 색채가 변화되고 손상되기 시작했다.

동굴을 만들고 그 곳에 벽화를 그리기 위하여 황토 흙이나 소석회, 모래 등의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마르기 전에 물감을 발라 그림을 그렸다는 ‘프레스코화(Fresco)기법’을 공부하던 학창시절이 기억난다. 왜 프레스코화 기법이 발달했었는지를 정확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벽화를 아름답게 그리고, 오래 보존하고자 회화 기법을 개발하고 연구하여 프레스코화 기법으로 정착시켰던 그들의 작품에서 다양한 표현력, 구성력, 재치와 익살, 해학과 예술로 연결되는 무한한 작품성을 발견했다.

1번 굴은 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아잔타 석굴 중에 최고의 벽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입구에서 신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도록 엄격히 통제를 하고 있다.

벽화 속에 나타난 부처의 모습이 일본의 법륭사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담징의 벽화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다. 풍만한 육체의 관능미를 자랑하며 흑인공주가 유혹을 하고, 곡선미가 유연한 연꽃 든 보살들이 화려한 색채 속에서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의 위력을 보여준다. 왜 이곳에서 한국화가 박생광이 강한 충격을 받았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 것만 같다. 붓다의 전생과 이생을 그린 2번 석굴의 벽화, 4번 석굴의 조각 작품들, 어느 하나 소홀이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작품들이 연속된다. 생동감을 연결하는 석굴과 석굴 사이는 계단과 통로로 만들어져 그 연결 구성이 아름답고 자연스럽다.

미군 병사에 의하여 최초로 발견된 10번 석굴은 B.C 2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이다. 이 석굴 앞에서 와고레강을 올려다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석굴은 17번 석굴이다. 불교의 설화, 무희들의 관능적인 춤, 붓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속세에서 인연을 맺었던 부인과 두 아들에게 탁발하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벽화로 남아있다.

석굴을 드나들며 조금씩 드려다 본 짧은 시간이 벌써 한나절이다. 명상에 잠긴 승려들의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씻어 주던 강물은 아무 말 이 없다. 해탈의 경지를 알려 주려는 듯 조용히, 서서히 그리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흐른다. 말없이 흐르는 와고레 강이 조용히 입을 연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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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 협곡/ Markerpen / 2007
아잔타 석굴 협곡/ Markerpen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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