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에 찾아간 북한 개성

선죽교
선죽교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성.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남한땅이었지만 휴전과 동시에 남쪽과 운명을 달리한 비운의 땅 개성. 2007년10월19일 남북복싱 경기 관람차 북녘 땅인 개성땅을 밟았다.

동트기 전에 서울 잠실운동장을 출발했다. 1시간만에 민통선 안에 위치한 경의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북에 가장 가까운 땅은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였다. 그 곳에서 수많은 실향민들이 고향을 향해 목놓아 울었는데, 그 한이 서린 땅을 너무나 쉽게 버스로 통과했다.

출국이 아닌 출경수속을 밟았다. 남의 나라에 가는 게 아니라 내 동포의 땅으로 가는 길이기에 출경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리고 코끝이 찡해졌다.

출입문 앞에 붉은색 깃발을 달고, 앞뒤 번호판을 가린 채 북으로 향하는 버스 차창 너머 다가오는 북녘의 풍경은 삭막함 그 자체였다. 산에는 단 한 뿌리의 나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헐벗었고, 심각한 식량난을 반영이라도 하듯 켜켜이 쌓인 다랑논과 다랑밭이 산꼭대기까지 이어졌다.

북쪽 출입사무소에서 까다로운 입경절차를 끝내고 뻥 뚫린 경의선 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불과 20분만에 개성시에 닿았다. 역사시간에 귀가 닳도록 들었던 고려말 충신인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피살된 선죽교와 고려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구경했지만 인위적인 손질이 많은 탓인지 역사의 향취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북한 주민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렜다. 개성땅 공기를 마시고 있는 만큼 북한주민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북녘에서 남쪽 사람들은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었다. 방북단이 버스에서 내리는 곳에서부터 반경200m지역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됐다. 검열원들이 군데군데 배치돼 방북단과의 접촉을 사전에 차단했다.

김일성동상 앞에서의 사진촬영이 가능한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동상을 향해 셔터를 눌렀는데 검열원들의 제지는 없었다. 순간 욕심이 났다.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어떨까.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잠시 기다리시라요”하면서 검열원이 달려왔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얼어붙는 듯 했다. 혹시 카메라를 압수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검열원의 몇 마디에 북한주민들의 의식구조를 엿볼 수 있었다.

“위대하신 수령 아바이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사진을 찍습네까. 당장 내려가시라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사진 찍는 것은 가능한데 절대로 사진 속 인물의 머리가 위대하신 수령님보다 높으면 안됩네다.”

철책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던 남북이 이제 하나로 연결됐지만 여전히 차창 너머로 남과 북은 갈려 있었다. 차창 하나의 벽이 무너져 남과 북 주민들이 손을 맞잡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언제일까. 답답한 가슴을 안고 남녘행 버스에 올라탔다. <개성=글·사진 한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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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10월19일 개성 시내 전경. 북한 제3의 도시이자 직할시인 개성이지만 차량이 한 대도 다니지 않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삭막한 느낌이다. 방북단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도로 곳곳에 검열원이 배치되어 있다.
2007년10월19일 개성 시내 전경. 북한 제3의 도시이자 직할시인 개성이지만 차량이 한 대도 다니지 않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삭막한 느낌이다. 방북단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도로 곳곳에 검열원이 배치되어 있다.

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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