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의 소박하고 청빈한 삶…‘위대한 사상’고스란히

간디가 생전에 사용하던 방
간디가 생전에 사용하던 방
<우송 김석기 화가의 스케치 여행기를 시작하며>

한국화가 雨松 김석기씨(60) 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많은 것은 눈에 담아왔다. 혼자만 눈 호강을 누리기가 미안해서인지 수묵화, 스케치, 사진 등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히말리아의 웅장함, 산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그들의 풍경과 풍물을 보면서 기행문을 썼다. 대전일보는 우송의 기행문에 그림과 사진을 곁들여 ‘인도 스케치 여행기’란 이름으로 연재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집을 찾아서’

신라의 승려 혜초(彗超 704-787)가 1300년 전 그 당시 천축국으로 알려진 인도여행을 나섰다. 떠나는 이는 100명이 되어도 돌아오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는 인도의 여행은 실로 지루하고 길고 먼 험난한 여행 길이였다. 스승 금강지의 권고로 중국의 광주를 출발한 혜초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자바섬 앞바다를 경유하여 북인도의 불교성지 구시나가라 등을 거쳐 파키스탄, 이란 등을 경유하면서 4년이라는 긴 여정 끝에 중국의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성덕왕 26년(727)에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세계제일의 여행기를 남긴다.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홍콩과 인도의 수도 델리국제공항을 경유하여 인도 제일의 경제도시라는 남인도 뭄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장장 열다섯 시간의 지루한 여정이었지만 승려 혜초의 4년 여행을 생각하면 어찌 그 길이 멀다, 힘들다 말할 수 있겠는가?

뭄바이 국제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오른 버스에서 차창을 두드리는 검은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인도가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이는 인구가 많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민족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가 살았던 집을 찾았다. 아담하게 지어진 3층 건물로 서민적이고 고전적인 분위기다. 길 건너편에서 간디의 집을 스케치했다. 어린소녀 한명이 다가와 그림을 들여다보면서도 손을 벌리고 돈을 달라고 칭얼댄다.

간디의 집안으로 들어서니 간디의 반신 동상이 인자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긴다. 그의 서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가 썼던 방안에는 아직도 물레와 생활도구들이 그대로 나란히 놓여있다. 한눈에 그가 아주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왔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또 그 청빈함이 인도의 에너지가 되었다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었다.

1922년 간디를 방문한 인도의 문호 R.타고르는 ‘위대한 넋’이라는 뜻을 가진 ‘마하트마’라는 이름을 간디에게 붙여 주었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카람찬드간디’. 그러나 그의 본명을 정확하게 아는 이들은 드물다.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난 간디는 변호사로서 활동 중 남(南)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의 7만 명 인도사람들이 백인의 박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는 그 곳에서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했다. 인도인들은 전쟁참여 조건으로 완전독립을 약속 받으려 했으나 타결을 보지 못하게 되자 영국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며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47년 7월 인도가 분할 독립했을 때, 간디의 나이는 78세였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계속한 그는 결국 반(反)이슬람 극우파의 한 청년의 총탄에 의해 쓰러지고 만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반대를 하고, 온 인도의 국민이 다 나를 잘못이라 하더라도 나는 일어서련다. 인도를 위해서 또 세계를 위해서 말이다. 나도 지금 우리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 불복종 운동을 하기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하여 도망가는 장군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다.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 위대한 무기를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간디의 집을 나서면서 다시 한 번 위대한 지도자의 일생을 되돌아본다. 한 민족이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행운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아라비아해를 바라보며 해안가를 달렸다. 달리던 차가 영국의 조지5세가 인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4년에 세웠다는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Gateway of India)에 도착 했다. 웅장한 석조전의 위용이 그 당시 영국의 권위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게이트를 중심으로 뭄바이의 모든 교역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게이트에서 11km 떨어진 엘레판트 섬을 연결하는 보트 선착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넓은광장을 나르는 수많은 비둘기들의 비상을 따라 시선이 머무는 출렁이는 파란 물결위에서 인도인의 아름다운 미래와 행복을 꿈꾸던 위대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조용한 미소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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