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진 ‘세상보기’

이제 눈길을 나라 밖으로 돌려보자. 어제까지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회의는 21세기 들어와 가속화되고 있는 국제질서 재편의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할 것이 분명하다. 냉전시대의 동맹체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동맹체제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호주의 세 정상이 8일 회담을 갖고 3각 군사동맹 구축에 합의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존 하워드 호주 총리가 “태평양 주변 3개 민주국가의 공동이익을 지키려는 의지”라고 밝힌 데서 알 수 있듯이 태평양을 사이에 둔 세 해양세력이 새로운 동맹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구도의 중심축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이다.

미국은 한 발 더 나아가 인도까지 참여시켜 태평양·인도양을 관통하는 새로운 안보질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APEC회의 기간과 겹치는 4일부터 9일까지 인도 벵골만과 말라카 해협 일대에서 벌인 미·일·호주·인도·싱가포르 해군의 대규모 연합 군사훈련은 미국의 의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말라바-07’로 명명된 이 군사훈련은 미국의 니미츠호 등 2척의 핵 항공모함과 인도의 항공모함 1척 등 3척의 항모, 전함 25척, 전투기 160대가 동원된 이 지역 최대의 군사훈련이었다.

미국이 이처럼 아시아·태평양 일대에 새로운 전략지도를 그리고 있는 이유와 배경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세계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속셈에서다. 13억 인구의 중국은 이미 세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아직은 아니지만 미국에 필적할 만한 정치대국을 꿈꾸며 군사력을 착실히 키워가고 있다. 아시아 나아가 세계 패권대국의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내년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의 이같은 원대한 구상을 공식적으로 세계 만방에 알리는 첫 신호탄이 될 것이다.

러시아는 어떤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데 이어 90년대 초반 공산진영이 해체되면서 2등국가로 전락한 러시아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해 왔다. KGB 출신의 푸틴 대통령이 권좌에 앉으면서 국내 혼란을 극복하고 석유·천연가스 등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힘의 정치를 구사하면서 옛 소련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푸틴 대통령은 8월초 가상의 핵폭탄을 장착한 장거리 폭격기를 미군기지가 있는 태평양의 괌도 부근까지 출격시키는가 하면, 최대 10개의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시네바’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을 해 8300km를 날아가 목표를 명중시키는 위용을 과시했다. 이같은 러시아의 계속된 힘의 과시는 미국의 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중국과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4개국과 함께 8월 9일부터 17일까지 우랄산맥 일대에서 대규모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군사동맹관계를 과시한 것이다. 이들 6개국은 2001년 6월 출범한 상하이협력기구(SOC) 회원국들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2005년 SOC를 통해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반미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토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21세기에 들어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각기 동맹체제를 구축해 대결하는 모양세를 띠고 있다. 50~80년대 냉전시대 때 북방삼각동맹(소련-중공-북한)과 남방삼각동맹(미국-일본-한국)이 한반도의 휴전선을 경계로 대결구도를 펼쳤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문제는 새로운 국제질서 재편에 한국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계속된 친북, 자주외교노선으로 동맹이었던 미국·일본과 사이가 벌어진 결과다. 그렇다고 중국·러시아와 가까워진 것도 아니다. 뉴스위크는 이같은 한국의 처지를 ‘담장 위에 서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냉전질서 속에서 한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왕따당하는 신세가 될 것인가. 심각한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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