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진 ‘세상보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8월말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은 바둑에서 꽃놀이 패와 같다. 북한에 주지 못해 안달하는 참여정부로부터 정상회담을 통해 경제적으로 더 많은 것을 받아 낼 수 있고, 12월 남쪽에서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영향력을 미칠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잘만 하면 오는 20일부터 말일까지 계획되어 있는 한미합동의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을 중단시킬 수도 있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서해상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양보를 받아낼 수도 있다. 경수로를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고, 보안법 폐지를 얻어낼 수도 있다.

남쪽에 줄 것은 평화(平和)밖에 없다. 북핵(北核)문제는 어차피 미국과 해결할 문제이니 적당히 말로 포장해 노 대통령의 체면을 살려주는 선에서 생색내기만 한다. 말이 평화이지 남쪽을 향해 ‘불바다’ 발언 같은 협박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않으면 남쪽의 진보세력은 크게 고무될 것이다.

조금 양보해 선물 한두 개쯤 준비할 수도 있다. 국군포로, 납북자, 이산가족 문제 등 남쪽에서 목을 매는 인권문제에 단비를 뿌려준다. 북한용어로 인덕정치를 베푸는 것이다. 남쪽 인민들에게 김정일 위원장의 후덕함을 알리는 절호의 찬스다.

이리 재보거나 저리 재보거나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남는 장사다. 노 대통령은 레임덕에 걸려 있는 자신에게 정상회담의 영광을 안겨준 김 위원장을 위해 다음 정권에서 부담할 항만건설 등 대규모 사회간접시설(SOC) 지원 약속까지 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달라는 대로 주어도 남는 장사”라고까지 말한 노 대통령이 아니던가. 참여정부가 상호주의를 포기한 지는 이미 오래다.

이쯤해서 몇 가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우선 2000년 6·15공동선언에 포함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약속이다.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하건, 서울에서 하건, 아니면 제주에서 하건 장소가 무슨 문제인가 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다.

첫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d servanda)는 인류 보편의 원칙에 위배된다. 김정일 본인이 직접 서명한 6·15공동선언에 약속한 내용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앞으로 무수히 양산될 남북간의 약속은 어떻게 되겠는가.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일까.

둘째, 남북간 신뢰관계를 해칠 가능성이 크다. 믿음은 작은 것을 실천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자칫 역사적인 6·15공동선언 전체를 크게 훼손할 가능성마저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이번 정상회담은 서울에서 열려야 맞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어떤가. “노무현 대통령을 조금이라도 더 잘 모시려고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논리는 궤변이다. 정상회담 장소를 평양으로 고집한 것은 대한민국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남북교류가 있을 때마다 제기되는 문제지만 북한의 김정일 체제를 언제까지 용인할 것이냐는 담론을 다시 끄집어 내야 한다. 김정일 체제는 한마디로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다. 형이상학적으로는 수령 중심의 주체사상으로 인민을 세뇌하고 형이하학적으로는 식량배급권을 갖고 인민의 목줄을 죄고 있다.

김정일 수령체제 문제 제기는 남북관계 화해발전에 걸림돌이 된다하여 애써 외면하고 심지어 금기시까지 하지만 언젠가는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민족문제이다. 당장 북한 동포의 인권문제에도 직결되는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북한이 개혁 개방에 닭살이 돋을 만큼 과민한 것도 수령체제를 굳건히 지켜나가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남북정상회담의 파장은 단순한 남북관계에 그치지 않는다. 6자회담에서 보아왔듯이 한반도 문제는 국제적으로 복잡하다. 북핵문제 해결에서부터 한국전쟁의 종전선언과 평화체제로의 이행문제, 탈북자 문제, 북한식량지원 문제 등등 한반도를 둘러싸고 해결해야 될 국제적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엔 극동지역에서 미국을 비롯한 중국·일본·러시아의 군사력 증강 경쟁이 치열하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신냉전의 기류마저 느껴진다. 이들 강대국들의 ‘권력정치’(power politics)가 우리의 운명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 계속 주시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규진(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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