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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귀한 이름들

2007-08-06기사 편집 2007-08-05 13: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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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찍 퇴근을 하여 집에 돌아 왔던 적이 있다. 늘 낙천적인 웃음으로 온 집안을 환하게 밝히던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듯 싶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덥고 축축한 날씨의 주인공인 오랜 장마탓인가 하였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역시 아내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래서 난 그 날 가정예배(우리 가정에서는 자기 전에 늘 가정예배를 드린다)를 좀 일찍 당겨서 초저녁에 드리자고 했다.

예배를 드리던 중 난 아내에게 한 가지 제의를 하였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우리 삶에 귀한 도움을 주셨던 분들인데 그 동안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 못했던 분들의 이름을 서로 한 번 얘기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분명히 나에게 귀한 도움을 주셨던 분들인데 저들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 못했던 분들이 기억의 실타래를 타고 줄줄 이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어떤 분들은 그 분들의 성함마저 기억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네 살 때쯤 이북에서 내 말수레를 끌면서 나와 놀아주셨던 시골 총각 전도사님, 그 분은 후에 공산당들에게 추운 겨울날 순교를 당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섯 살 때 이북에서 피란 오던 중 진남포 다리가 폭격에 끊어졌을 때 날 업고서 끊어진 철다리를 기어올라주셨던 한창걸 목사님. 가덕도에 피란 갔을 때 무료로 자기 집 밥을 우리 식구들에게 내어주고 오랫동안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던 기배 어머니, 지금도 시골 촌부였던 그 아주머니의 착했던 얼굴이 눈에 선한데.

공주로 이사를 와서 중동 국민학교를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김선일 선생님, 날 자전거 뒤에 태워 주시며 이 다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늘 말씀해 주셨는데, 그 분은 참 미남이셨었다. 나는 커서도 김 선생님이 늘 보고 싶었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공부를 가르쳐 주시며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시며 너희도 남을 사랑하라고 교훈해 주셨던 늙으셨던 선생님, 불행히도 난 그 분의 성함이 기억되질 않는다.

서울에서 신학대학을 다닐 때 자기 생활비를 줄여서 나에게 장학금을 주셨던 미국 선교사 할머니, 이분의 성함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강원도 원주에서 군대 생활을 할 때에 졸병 생활이 하도 지루해서 몰래 부대를 빠져나와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타려다 역전에서 헌병에게 붙들려서 역전 앞 헌병대에 끌려갔었는데, 마침 그 곳에는 한 이십 명 정도의 졸병들이 엎드려 뻗친 자세에서 ‘빳따’를 맞고 있었다. 어느 덧 내가 맞을 차례가 되었었는데 때리던 하사관이 갑자기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하며 얼른 그냥 가라고 해서 무사히 그 곳을 빠져 나왔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하사관의 이름은 커녕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 중 돈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을 때 특별히 장학재단에서 편지를 해서 내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던 할아버지 교수님, 그 분은 그 후에 곧 돌아가셨는데 부끄럽게도 이젠 그 선생님의 성함이 생각나질 않는다.

어디 이뿐인가.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서 작은 연구소를 열고 일을 할 때 첫 6개월 간은 매일 찾아와 격려해 주시며 꽃병에 꽃을 꽂아 주었던 분, 몇 개월 전 미국 시애틀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이 분들에게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까. 왜 그 때에 좀 더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히 하지 않았었을까.

그날 밤 나와 아내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묻힌 채 잠자리로 향했다. 내가 지금의 나 된 것은 나 때문이 아니었다. 잊혀진 귀했던 손길들 때문이었다. 인생에서 내가 굳이 불평해야만 혹은 교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요한<목원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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