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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과 여의도 ‘두개의 여름’

2007-08-01기사 편집 2007-07-31 17: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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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재임 시절 미국 출판계는 여름 휴가철이 되면 대통령의 도서 선택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휴가를 떠나면서 어느 책을 가지고 가느냐에 따라 판매량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독서 목록이 뉴스가 된 것은 지난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의 애독서 10선이 나오면서부터다. 케네디가 플레밍의 첩보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본드 시리즈가 불티나게 팔렸고 이후 휴가 시즌이 되면 대통령의 독서 목록이 연례 행사처럼 공개된다.

대통령이 몇 권의 책을 들고 휴가지로 가버리면 워싱턴 D.C.는 정치적으로 방학을 맞는다. 8월에는 의회도 문을 닫는다. “너무 많이 노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비아냥이 없지 않지만 국민들은 대체로 용인하는 분위기다. ‘휴가의 왕’이라고 불리는 부시 대통령의 경우 여름 휴가는 통상 한 달이다. 자신의 목장이나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휴식과 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이런 휴가 문화는 사생활을 보장해주고 대통령 또한 여유를 갖고 국정을 돌봐야한다는 문화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사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의 휴가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정치인들은 여름 휴가에서 현안에 대한 구상을 다듬고 현장에 복귀해 청사진이나 비전을 제시하곤 한다. 하반기 국정 운영의 큰 틀이 휴가지에서 정해지는 셈이다. 이때 휴가지에서 읽는 책은 소일거리로서 뿐 아니라 무언의 조언자 역할까지 해주는 게 아닐까.

중국은 여름이 되면 정치의 중심지를 베이다이허로 옮긴다. 그래서 베이다이허는 하도(夏都), 하궁(夏宮)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여름 정치의 수도로 탈바꿈한다. 덩샤오핑이 해수욕을 하며 건재를 과시한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매년 여름 이 곳에 모여 중대 현안을 논의하고 국사를 조율하며 나라의 운명을 결정해왔다. 이너 서클의 막후 정치판이지만 나름의 멋과 여유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1953년 휴양을 겸해 일하자는 취지로 도입했지만 국민들의 거부감은 심하지 않은 것 같다. 올해는 미중 현안과 한반도 문제 등이 논의될 예정이라는 데 밤이 되면 영화를 감상하거나 무도회를 즐긴다는 후문이다.

물론 휴가를 떠난다고 정치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198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는 여름 휴가 독서 목록이 알려져 곤혹을 치렀다. ‘스웨덴 토지이용계획’에 관한 내용을 탐독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뒤 ‘따분한 관료’라는 이미지가 고착화되면서 유권자들의 버림을 받았다. 해마다 계속돼온 베이다이허 회의가 문화혁명 기간 중 10년이나 중단됐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변이 있거나 비상 상황일 때 정치인들의 여유도 함께 사라짐을 보여주는 사례다.

8월의 여의도는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뜨겁다. 대권 다툼에 휴가는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인 모양이다. 한쪽에서는 경선 과열로, 다른 한쪽은 제3지대 창당으로 희한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으니 관전자들이 더 힘든 지경이다. 찜통더위 속에 그런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국민들 심사는 편하지 않다. 정년이 없는 것도 모자라 휴가까지 반납하고 싸움질이니 이 여름 짜증스럽다. 유권자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저효율 정치 행태다.

그래서 해마다 9월에 전당대회를 갖는 영국의 오랜 정치 문화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노동당과 보수당 등 주요 정당은 여름 휴가를 마친 뒤 연례전당대회를 열어 지난 1년을 점검하고 국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한다. 휴가지에서 정강 정책들을 가다듬어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국민들 입장에서도 전당대회를 축제처럼 지켜보며 참여하는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국정 현안에 얽매여 휴가를 취소하고, 대권 때문에 휴가를 잊은 우리의 정치 현실과 대비된다. 정치권의 휴가 부재 시대에 살다보니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탐독한 책을 골라 읽는 즐거움도 언젠가부터 사라져버렸다. 정치 지도자들의 휴식과 사색의 시간을 한가롭게 지켜보는 그런 여름을 언제쯤이나 만날 수 있을까.

송신용<정치행정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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