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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山의 법칙

2007-07-04기사 편집 2007-07-03 17:4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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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길 다리 힘이 풀려 무릎이 꺾이거나 돌부리에 걸려 휘청이게 되는 것은 대부분 내리막에서다. 등산 초보자들도 그쯤은 안다. 산에 오를 때 힘을 다 써버려서는 안된다. 힘을 남겨 놓아야 미끄러지거나 후들대지 않고 내려올 수 있다. 하산 길을 한가롭고 여유로운 것으로만 생각하면 낭패를 보기 쉽다. 제 아무리 야트막해도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어려운 게 산이다. 산에서 일어나는 사고와 조난은 하산 때 많다. 빠른 속도로 내려오다 보면 길을 놓치는 경우가 생기고, 균형을 잃으면서 미끄러지기도 한다.

산에 대해 알 만큼 안다는 프로 산악인들은 하산을 더욱 중요시하고 두려워한다. 히말라야 도전 중 산에 묻힌 한국원정대의 몇몇 역사가 그랬듯 등정보다 하산이 훨씬 위험하기 때문이다. 지난 1989년 안나푸르나 원정대는 하산 도중 탈진으로 2명이 추락사했다. 트리치미르 원정대(1995년)와 브로드피크 원정대(1996년), 푸모리 원정대(2005년)의 비극은 모두 하산 과정에서 발생했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환희와 성취감을 뒤로 하고 하산이라는 또 하나의 산행을 준비해야 하는 등반은 흔히 인생에 비유된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겸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르막이 있다면 내리막이 있다는 섭리를 알기 때문일까.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오른 엄홍길씨는 정상에 섰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잠깐, 내려갈 일부터 생각한다. 무사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성공했다’는 엄청난 환희가 밀려온다”고.

어느 분야에서든 정상에 선다는 건 경이롭고도 영광스런 일이다. 나지막한 산에 오르고도 환호하고 싶어하는 게 소시민들의 심정 아닌가. 남다른 도전과 용기로 정상에 섰을 때의 환희는 경험한 자만이 안다. 하물며 그 자리가 ‘최고 권력’일 때의 황홀감은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해냈다는 자신감은 그러나 영원히 정상에 머물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산에 오르면 내려가야 한다는 진리를 곧잘 망각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역’은 욕심에 한계가 없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른바 항룡유회(亢龍有悔)다.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내려갈 길밖에 없음을 뉘우친다는 의미로 부귀영달이 극도에 달한 사람은 쇠퇴를 염려하며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이에대해 “항룡은 너무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너무 높아 교만하기 때문에 자칫 민심을 잃을 수 있으며, 남을 무시하므로 보필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격동의 한국현대사에서 최고 권력자들은 항룡유회의 교훈을 잊곤 했다. 하와이로 망명하거나 심복에게 시해됐고, 거센 민주화 요구에 쫓겨나듯 청와대를 나와야 했다. IMF를 자초하거나 퍼주기 논란 속에 국론을 양분시킨 채 물러난 대통령도 있었다. 정상에 높이 오를수록 하산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정상에 섰을 때 하산을 준비하지 않거나 영원히 정상을 지킬 수 있다는 오만과 독선의 결과다.

우리는 지금 또 한명의 대통령을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더욱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것은 하산 준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한발 더 나아가 공무원 선거 중립 의무 위반 시비를 낳으며 헌법기관인 선관위와도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전직 대통령들은 임기말이 되면 구호로나마 중립을 외치고, 거국 내각을 구상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민심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 같다. TNS 코리아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는 그 정도를 잘 보여준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원하는 후보가 있다면 지지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지지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78.8%였다. 항룡유회가 메아리 치건만 당사자는 귀를 막고 있으니 국민들만 민망하고 딱하게 됐다.

<정치행정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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